한국이 먼저 앓는 병을 10~20년 뒤 선진국들도 똑같이 앓을 것이다.</h1>2023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2를 기록하자 세계 인구학자들은 경악했다. 인구 유지에 필요한 수준인 합계출산율이 2.1인데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나 전염병 없이 이 수준까지 출산율이 떨어진 나라는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일본·중국·독일·이탈리아가 한국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는 K팝과 K드라마만 수입하는 게 아니다. 한국의 미래를 예습하고 있다.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는 유독 격렬하고 다층적이다. 세대 갈등, 젠더 전쟁, 극단적 양극화, 저출생, 지방 소멸 같은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고 있다. 외부에서 보면 혼란스럽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 달리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은 지금 선진 산업사회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어떤 임계점을 가장 먼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통과하고 있다. K팝과 K드라마가 한류라면, 이 갈등의 풍경도 넓은 의미에서 한류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현상의 일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젠더 갈등을 보자. 한국의 남녀 갈등은 세계에서 가장 첨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로 갈라지는 현상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 미국·영국·독일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젊은 남성과 젊은 여성의 투표 성향이 극명하게 갈렸다. 학자들은 이를 "성별 정치 분열"이라 부르며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이미 10년 전에 그 분열을 겪었으며 지금도 그 한가운데 있다.
세대 갈등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청년들은 부동산·일자리·연금 문제에서 기성세대와 정면 충돌한다.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 평균 임금의 20년치를 넘어선 지 오래다. 노력해도 진입할 수 없는 자산 시장 앞에서 청년들이 선택한 것은 포기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 게 이미 10년 전이다. 지금 영국의 밀레니얼 세대도 똑같은 좌절을 겪고 있다. 런던 집값은 평균 연봉의 15배다. 한국이 먼저 앓은 병의 이름이 이제 영어로도 번역되고 있다.
극단적 양극화는 어떤가. 한국의 소득 불평등은 압축 성장의 필연적 부산물이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속도다. 한국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절대적 빈곤에서 상대적 박탈감으로 문제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계급의 문제가 폭발했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2억 명에게 공명(共鳴)한 이유다. 죽음의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는 이야기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절망의 보편성"이 한류 콘텐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갈등은 실패의 증거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갈등이 가시화된다는 것은 억압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젠더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적어도 그 문제를 공론장에서 싸울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출생을 두고 정부·기업·시민이 동시에 해법을 논의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임상 실험장의 가치는 병을 먼저 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의 경과와 처방을 기록하는 데 있다.
세계는 한국의 갈등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미래를 예습하고 있다. K드라마가 한국의 감성을 수출한다면, 한국의 사회 갈등은 인류의 공통 의제를 가장 먼저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이 갈등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 혹은 헤쳐나가지 못하느냐 역시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앞으로 수십 년간 씨름해야 할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안이 될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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