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흔을 앞둔 나이에 갑자기 샴페인 대신 사케를 만들겠다니 다들 ‘미쳤다’고 했죠. 하지만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그 누구도 못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니까요.”
샴페인의 세계를 잘 몰라도 돔페리뇽이라는 이름 앞에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찬란한 순간에 헌사하는 이 시대 최고의 샴페인. 이 화려한 명성 뒤엔 한 남자의 끈질긴 집념이 있었다. 1990년부터 28년간 돔페리뇽 수석와인메이커(마스터)로 활약한 리샤르 조프루아(72). 그는 샴페인이 시간에 따라 계단식 도약을 이룬다는 ‘플레니튀드(plenitude)’ 철학을 정립한 거장으로 꼽힌다.
편안한 은퇴가 보장된 시기, 그는 돌연 프랑스를 떠나 일본 도야마현의 한적한 마을 시라이와로 향했다. 샴페인의 전유물인 ‘아상블라주(assemblage·블렌딩)’ 기술을 사케에 이식하는 전무후무한 실험을 위해서다. 그렇게 2020년 탄생한 사케 IWA5(이와5)는 기존 사케의 문법을 뒤흔들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사케 브랜드로서는 이례적으로 생산량의 절반을 수출한다. 생명을 다루던 의학도에서 발효의 마법사로 그리고 또다시 사케 마스터로 새로운 도전장을 내민 이 노신사를 지난 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갈라 디너 현장에서 만났다.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하셨습니다.
“‘우아하게 나이 드는 기술’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스스로 편안한 상태에서 벗어나 더 창조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리셋’이랄까요. 처음엔 많은 이가 돔페리뇽 모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우산에서 벗어나는 것을 우려했어요. 차라리 거대 자본의 도움을 더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말이죠. 하지만 어떤 대상을 향한 사랑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선택을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맞은 인생의 세 번째 챕터인 지금이 삶에서 최고의 순간입니다.”
▷특별히 사케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요.
“사케는 1200년 역사를 지녔음에도 세계 시장에서는 여전히 젊고 생소한 술입니다. 지리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제품이 일본 내수용에 그쳤어요. 와인이 포도가 자라는 테루아(terroir)에 크게 의존한다면, 사케는 만드는 사람의 기술과 지성이 더 중요합니다. 재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제조 과정에 따라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오랜 역사의 사케를 가장 ‘현대적인 술’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왜 유명한 양조 지역이 아니라 시라이와였습니까.“‘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시라이와에서 제 비전을 이해해주는 파트너를 만났고, 본능적으로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니가타와 교토만큼 사케 양조로 유명한 지역은 아닙니다. 대신 더 진보적이고 기업가정신이 있는 지역이어서 새로운 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어요. IWA5라는 이름도 이 지역에 대한 헌사를 담은 것입니다.”
▷샴페인의 아상블라주 기술과 빈티지 개념을 사케에 이식하셨습니다.
“‘밸런스’라는 건 결국 좋은 조화를 만드는 작업이에요. 사케라고 해서 샴페인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물과 쌀이라는 사케의 구성 요소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나면 접근 방식은 비슷합니다. 마시기 편한 느낌, 전반적인 균형, 무게감과 풍부함 그리고 마신 후의 긴 여운을 달성하는 게 목적이죠. 하지만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블렌딩을 한 전례는 없어요. 게임 체인저를 자처했다고 할까요.”
▷기술적 어려움은 없었나요.
“샴페인이 숙성되는 방식과 사케가 나이 드는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전에 시도하지 않은 방식이기에 벤치마킹할 대상조차 없었죠. 그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맛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확인하고, 그것을 다시 초기 블렌딩 설계에 반영하는 과정은 아주 긴 호흡의 작업입니다. 원하는 맛을 뽑아낼 때까지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죠.”
▷IWA5라는 이름에 붙은 숫자 5와 병마다 붙은 번호(1~6)의 의미는 무엇인가요.“5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조화’의 상징입니다. 블렌딩은 곧 조화를 뜻하죠. 그리고 매년 새로운 번호를 붙이는 건 그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매년 기후가 다르듯, 매년 새로운 실험을 통해 다른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1번부터 6번까지 수직 테이스팅을 하면 연도별로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지루한 평탄함보다는 기대와 놀라움을 만들고 싶었어요.”
▷의학도였던 배경이 어떤 영향을 줬나요.
“의학적 배경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겁니다. 양조는 생화학이자 유기적인 과학이죠. 인간의 몸이 수조 개의 세포로 이뤄진 유기체이듯, 와인과 사케를 만드는 미생물 또한 하나의 세포를 가진 생명체입니다. 의학 공부를 통해 생명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됐어요. 생명체와 내밀하게 연결되는 것, 그게 양조의 본질이니까요.”
▷사케 마스터로서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현재 와인업계의 가장 큰 실수는 새로운 관객을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에게 더 비싼 와인을 팔려고만 하죠. 그래서 사케가 더 보편적인 술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IWA5는 일본과 해외 시장 매출 비중이 50 대 50입니다. 역사상 해외 판매 비중이 45%를 넘어선 유일한 사케일 겁니다. 이 경계를 확장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매력적인 사케의 세계로 초대하는 게 목표죠.”
▷IWA5와 잘 어우러지는 한식을 추천해 주십시오.
“한국의 다채로운 맛은 우리에게도 도전이지만, 특정 음식만을 추천하고 싶진 않습니다. IWA5는 고기 요리나 강한 향신료, 고추의 매운맛까지 우아하게 포용할 수 있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면 화이트 와인이 아니라 레드 와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구조감이 탄탄합니다.”
▷28년간 돔페리뇽의 정체성을 지켰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동안 타협하지 않은 가치가 있었나요.
“가장 중요한 건 ‘진정성’입니다. 만드는 과정이 진실해야 하고, 모든 판단은 가치에 기반해야 하죠. 그것만은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태도가 때로는 상황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를 만듭니다. 그것이 강한 브랜드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돔페리뇽이 그랬던 것처럼요.”
■ 리샤르 조프루아는
● 1982년 의학 박사 취득
● 1990년 돔페리뇽 5대 수석 셀러마스터 취임
● 2019년 LVMH 계열 모에헤네시 고문 취임
● 2020년 일본 사케 브랜드 IWA5 론칭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