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을 통한 안보 강화와 중국을 통한 경제적 번영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수혜를 입어왔다. 그러나 미·중 패권 경쟁이 단순한 무역 갈등을 넘어 기술 패권과 가치사슬의 분절로 이어지면서 이러한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경제가 곧 안보가 되는 지경학적 골드타임에 진입했음을 직시해야 한다.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네덜란드의 ASML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강력한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압박 속에서도 자국 핵심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과 끊임없이 협상하며 수출 품목의 사양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정교한 외교를 펼쳤다. 우리 정부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정책 입안자들 역시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되 우리 기업이 구축해 놓은 글로벌 공급망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단칼에 잘려 나가지 않도록 하는 회색지대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보조금법(CHIPS Act) 협상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공정 업그레이드 제한을 완화하거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통해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핵심 광물의 수급처를 동남아시아와 호주로 다변화하는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오직 국익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움직이는 유연함이 대전환 시대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성패는 거시경제 지표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삶터에서 결정된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여파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혹하게 다가온다. 서민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고 자영업자의 폐업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 건전성만을 외치는 것은 책임회피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에너지 가격 브레이크(Energy Price Brake)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너지 가격 폭등 당시 독일 정부는 단순히 현금을 살포하는 포퓰리즘을 경계하면서도 가계와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상한선을 설정해 심리적·경제적 안전판을 마련했다. 우리 역시 현재 불안한 경제 안보 환경에서 불필요한 선심성 예산은 과감히 덜어내고 서민지원과 더불어 글로벌 공급망 피해 기업과 산업재 시장의 변동성 불안에 노출된 기업들에 핀셋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불황기일수록 정부의 눈은 미래를 향해 있어야 한다. 당장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단기 처방도 중요하지만 AI, 첨단 반도체, 그리고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방산 신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놓친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이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단순히 보호무역주의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미래 에너지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미국의 담대한 국가 전략이다.
우리 정부도 기업의 발목을 잡는 관료주의적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K-방산 분야, 원격의료나 자율주행, 드론 산업 등 미래 먹거리 산업 분야에서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을 전면 도입해야 한다. 기업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운동장을 평평하게 다듬어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R&D 예산의 효율화는 필요하지만 미래를 위한 핵심 원천 기술 투자만큼은 정권에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담대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난제는 결코 정부 혼자 해결할 수 없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국민에게 현재의 위기 상황과 향후 전망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협조를 구하는 진솔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국민의 신뢰는 정책 집행의 강력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살트셰바덴 협약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노사정이 대타협을 통해 장기적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우리도 다양한 국가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해야 한다. 여야가 국가 안보 경제 앞에서는 머리를 맞대는 협치의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은 정부의 정책 방향을 신뢰하게 된다. 정부는 현재의 고통 분담이 미래 세대에게 어떤 가치로 돌아갈지를 수치와 논리로 성실히 설명해야 한다.
눈앞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임기응변과 보여주기식은 불신의 골만 깊게 할 뿐이다.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겠다는 정책적 양심과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겠다는 비장한 사명감만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한국방위산업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