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퇴직이 꿈이었던 사람이 있다. 외환 위기(IMF) 직후인 1997년, 불안한 시대를 지나 “한 조직에서 오래 버티고 싶다”라고 말하던 청년, 바로 <</span>버텨낸 밥값의 기록들>의 저자 오원택이다. 그의 이력만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 입사 5년 만에 두 번의 고속 승진, 48세에 자회사 대표 이사. 통상적인 기준이라면 ‘정점을 찍었다’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시간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버틴 시간이었다”라고 말한다. 억울함을 쏟아내는 대신, 그는 매번 같은 질문을 적어 내려갔다. ‘이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나는 살아 낼 수 있는가.’ 소위 찍혀서 힘든 시간들을 보내던 시간들, 수십 번 사표를 떠올리고도 결국 책상으로 돌아온 날도 그 질문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쌓인 메모는 서랍 속에 접혀 들어갔고, 수십 년이 지나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 책에는 잘 버틴 사람의 결과가 아니라 버티는 동안의 기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비슷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넨다. 당신도 이 시간을 살아 낼 수 있다고.
Q. 한국담배인삼공사 시절부터 30여 년간 한 조직의 안팎에서 격변의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본인의 직장 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하신다면 어떨까요?
저는 ‘살아 내는 것’에 대한 고민, 즉 실존의 고민이었다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1997년에 입사했는데 제 꿈은 정년퇴직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소박하고도 절박한 꿈이었죠. 당시엔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때가 외환 위기 직후였고, 그전에도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조직의 불안정함을 몸으로 겪었거든요. 그래서 “안정적인 회사에 가서 오래 다니자.”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연수원에서 꿈이 뭐냐고 묻길래 정말 정직하게 “정년퇴직”이라고 답했어요. 비록 좀 이른 나이에 임원이 되면서 계약직 신분으로 바뀌는 바람에 그 꿈을 온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30년이라는 시간을 무탈하게 지켜 낸 것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성취이자 성공입니다.
Q. 책을 읽어 보면 정년퇴직보다는 퇴사의 꿈을 더 많이 꾸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직장 생활 30년의 기록이라고 하셨는데 글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맞아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만두고 싶은 날이 더 많았어요. 4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회사 대표 자리까지 올랐지만, 저 역시 조직에서 수없이 찍히고 밀렸습니다. 여러 차례 승진에 누락되는 시절도 있었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퇴사를 수십 번 마음먹었어요. ‘마흔이 되면 나가자’, ‘쉰이 되면 나가자’라고 늘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활이 있잖아요.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사내 정치든, 억울한 일이든 말이죠. ‘억울하다’라고만 쓰는 건 감정의 쓰레기통이에요. 견디기 힘들 때마다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하나,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적어 두었던 거예요. 돌이켜보면 제 직장 생활을 관통한 건 출세나 성취보다도 어떻게든 나를 잃지 않고 살아 내려는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철학과 출신이라는 점이 책 전반에서 느껴집니다.
철학과를 나와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철학이 이렇게 좋은 학문인지를요. 여러 가능성과 다른 시각이 직장 생활을 버텨 내는 힘이 되더라고요. 나를 철저하게 제3자로 놓기도 하고, 마치 장기판에서 빠져나와 훈수를 두듯이요. 내가 나한테 훈수를 두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하고요.
Q. 사원으로 입사해 최고 경영자(CEO)까지 지내셨는데 성공담이 아니라 ‘버텨 낸 이야기’라 인상적입니다. 이유가 있나요?
30년을 무탈하게 살아 낸 것, 그 자체가 성공이라면 성공이죠. 그래서 이 책은 성공담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버텨 낸 기록’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대표 이사는 그냥 직무명 중 하나예요. 인사 담당, 재무 담당처럼요. 그들과 똑같은 월급쟁이였으니까요. 그래서 호텔에서도 직원들에게 ‘내 직원들’이라고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동료니까요.
이 책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라 상처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지금 저마다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Q. ‘버틴다’라는 것이 단순히 참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버티는 것을 살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를 악물고 참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사가 말하는 거창한 자아실현 이전에, 우리는 우선 살아 내야 하잖아요.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나를 지켜야 하고, 내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그 가장 현실적인 차원에서 버티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버티기를 미덕처럼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를 묻습니다. 시간은 늘 내 편이 아니고,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시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성공 공식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내 시간이 올 때까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성공하는 법보다 무너지지 않는 법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Q. 책의 프롤로그에 ‘흔하지만 쉽지 않은, 뻔한 말들의 무게’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 쉽게 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배려하라’, ‘적 없이 살아라’, ‘사람과 잘 지내라’ 등 흔히 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막상 그 말을 자기 삶에 적용하려고 들면 그때부터 어려워집니다. 저는 그 간극이 늘 궁금했어요. ‘왜 이렇게 흔한 말이 실제로는 가장 어려운 말이 되는가?’ 하고요. 그래서 프롤로그에서도 ‘흔한 것’과 ‘쉽지 않은 것’의 역설을 길게 붙잡았습니다. 그 흔한 말과 다짐으로 결국 쉽지 않은 직장 생활을 견뎌 왔기 때문입니다.
책의 목차를 봐도 그런 문제의식이 선명합니다. ‘남의 술잔이 비었는지 살펴라’, ‘타인을 비판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라’, ‘옳지 않은 상황을 견디는 힘’, ‘당신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입니까’ 같은 문장이 그렇죠. 하나하나는 익숙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조금도 만만하지 않은 주문입니다.
Q. 책에는 몸담았던 조직의 불편한 현실도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부담은 없으셨습니까?
망설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실제로 원고를 정리하면서 많이 덜어 냈습니다. 회사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은 일부러 많이 걷어 냈어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핵심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꼭 남겨야 하는 대목은 남겨야 했거든요.
왜냐하면 그 감정은 꾸며 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은 정말 참지 못해서 쓴 것이고, 그 안에는 젊은 시절의 치기와 격정도 들어 있습니다. 표현이 과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거짓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회사 생활을 미화하거나 성공의 외피로 포장하는 대신, 사람이 조직 안에서 겪는 불편과 모순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드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Q. 회사생활을 하면서 겪은, 어쩌면 부끄러운 면모까지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남의 잘못만 적으면 글이 쉬워집니다. 하지만 그런 글은 금방 얄팍해지죠. 조직에서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을 피해자로만 보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승진에서 누락될 때마다 처음엔 제 부족함을 인정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외부 탓을 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타인을 향한 비판만이 아니라 제 안의 비겁함과 자존심, 변명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책의 여러 글이 ‘타인을 비판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라’, ‘내 안의 알맹이는 과연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남의 허물만 보는 글보다 자기 허물까지 함께 보는 글이 더 늦게라도 오래 남는다고 믿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저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잘나 보이는 사람도 저런 시간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부끄러운 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그냥 부끄러운 거죠.
Q. 결국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장 현실적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시간이 내 편이 아닐 때가 많아요. 내가 뭘 해도 안 되는 시간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시간이 딱 맞으면 됩니다. 그걸 운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죠. 그 시간이 올 때까지 우리는 버텨야 해요. 나 자신을 지키고 버티다 보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깎아내고 칼바람이 불어도 자기를 지켜 내야 해요. 내 시간이 온다니까요. 그게 희망 아닐까요?
그래서 이 책은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밥값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이에요. 그 안에서 ‘내 시간이 올 때까지 나를 지켜 내자’, ‘무너지지 말자’, 그러다 보면 당신만의 시간이 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Q. 마지막으로 <</span>버텨낸 밥값의 기록들>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요.
“지금 당신이 사는 시간이 당신 편이 아니어서 힘들어도 언제가는 시간이 내편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단단히 나를 지켜 내는 법을 적은 책.”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박경희 기자 gerr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