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팽의 정수 들려준 조성진
27일 개막공연은 겨울을 밀어내는 대지의 울림처럼 장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서풍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선율의 곡들로 꾸며졌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지낸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봉을 잡았고,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호흡을 맞췄다.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TIMF앙상블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단원들과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이뤄졌다.
첫 곡은 윤이상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예악’이었다. 웅장한 종묘제례악을 서양 관현악으로 재해석한 곡이다. 진은숙 TIMF 예술감독이 윤이상의 작품 중에서 가장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며 골랐다. ‘예악’은 부채처럼 펼쳐졌던 박이 착 소리를 내며 하나로 합쳐지는 타격음으로 강렬한 시작을 알렸다.
다른 클래식 곡에서 부드러운 선율을 그리던 바이올린은 해금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오묘한 음색을 자아냈고,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악기는 피리의 숨결을 재현했다. 거문고를 타듯 현을 뜯고 지그시 누르며 꾸밈음을 만들어내는 현악기의 연주 기법도 돋보였다. 여기에 작은 방울들이 촘촘히 달린 슬레이벨이 더해지자 아기동자가 깨어난 듯한 무속적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어진 무대는 ‘쇼팽 스페셜리스트’ 조성진이 넘겨 받았다. 조성진이 자리에 앉자 객석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가 선택한 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 그에게 쇼팽 콩쿠르 우승을 안긴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아니었지만, 강한 타건을 시작으로 공연을 알렸다.
조성진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화답을 끌어내는 트릴(2도 차이 음을 빠르게 번갈아 연주하는 주법)까지 황홀한 선율을 몰아치며 관객을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이날 연주는 다른 무대에서 쇼팽 곡을 연주할 때보다 강건한 표현력이 돋보였다는 평가가 많았다.

백미는 ‘19세의 쇼팽’이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떠올리며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2악장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반주 위로 아련한 피아노 주제음이 울려 퍼질 때면 벚꽃보다 작은 하얀 잔꽃송이들이 피어나는 듯한 환영이 무대 위로 번졌다.
풋풋한 사랑의 설렘은 묵직한 저음부 연주를 기점으로 짙은 고뇌로 흐르더니 악장의 시작을 반복하는 연주와 함께 이내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됐다. 건반을 떠난 조성진의 왼손이 허공으로 솟았다가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내려앉는 모습은 소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는 쇼팽의 서글픈 손짓을 떠올리게 했다.
조성진은 두 곡의 앙코르곡 모두 쇼팽으로 여운을 이었다. ‘이별의 왈츠’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을 연상케 하는 아련한 인상을, ‘화려한 대왈츠’는 맑은 개울가에서 뛰어노는 강아지의 발걸음처럼 경쾌하면서도 목가적인 풍경을 그려냈다. 모든 연주를 마친 조성진은 그제야 홀가분한 듯 엷은 미소를 띠며 박수 세례와 함께 퇴장했다.

○지휘자 열정 돋보인 ‘봄의 제전’
2부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장식했다. 1913년 프랑스 초연 당시 파격적인 불협화음과 원시적 리듬에 분노한 관객들이 폭동을 일으켜 경찰까지 출동한 일화로 유명한 곡이다. 바순의 신비로운 고음으로 정적을 깨운 연주는 호른, 트럼펫 등 금관악기와 팀파니, 탐탐 등 타악기까지 가세하며 겨우내 웅크리던 생명체들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터뜨리는 봄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로버트슨의 역동적인 몸짓도 이 곡에서 정점을 찍었다. 백발의 지휘자는 오른발을 힘껏 차올리며 금관악기군의 폭발적인 연주를 이끌어냈고, 클라이맥스에선 좌우로 스케이트를 타듯 지휘대에서 미끄러지는 모습으로 시선을 끌었다.
올해 TIMF는 총 26회 공연이 마련됐다. 오는 30일 조성진 리사이틀, 다음 달 1일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리사이틀 등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들의 무대를 감상할 수 있다.
통영=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