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의 그림 한 점 보겠다고,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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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메이르 피버’의 시작, 1995년 워싱턴

    버미어, 베르메르, 페르메이르.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지역에서 활동했던 그는 영어권에서 ‘버미어’라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베르메르’로 불려왔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국립국어원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페르메이르’로 정착된 듯하다.


    내게는 미국에서 처음 접했던 발음인 ‘버미어’가 훨씬 더 친숙하지만, 어느 이름으로 부르건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상관이 없다. 다만 작품을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마다 상이하게 부르는 이름 때문에 잠시 당황스러운 상황을 겪기도 한다.

    바로 그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나기 위해 애써 전 세계 미술관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페르메이르 전작 투어'에 나서는 이들이다. 누군가에게 이 투어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로망이자 평생에 걸쳐 실천해가는 버킷리스트이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고, 장장 24년에 걸쳐 페르메이르를 만나기 위해 즐거운 ‘도장 깨기’ 여행을 다녔다.


    1995년 미국 내셔널 갤러리가 그 출발점이었다. 유학 생활을 위해 도착한 당시 워싱턴 DC에서는 어디 가나 페르메이르 전시회가 화제였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21점을 한자리에 모았던 이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을 넘어,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17세기 네덜란드의 거장을 현대의 슈퍼스타로 부활시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단 미술계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름 예술 애호가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어느 모임에서나 페르메이르의 작품과 만났던 순간을 감동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서로 유대감을 확인하곤 했다.



    집단적으로 최면에라도 걸린 듯한 그 분위기를 접하며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사로잡은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전시가 끝난 직후에 워싱턴에 도착한 나로서는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다행히 내셔널 갤러리에서 <빨간 모자를 쓴 소녀 (Girl with a Red Hat)>를 비롯해 네 점을 자체 컬렉션으로 소장하고 있었기에, 우선 이 작품들이라도 보자며 서둘러 미술관을 찾았다. 35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전 세계에 단 35점 남아있는 페르메이르의 모든 작품을 직접 찾아다니며 관람해보겠다는 무모하고도 아름다운 24년간의 투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7세기 더치 페인팅의 정점에 선 빛의 화가


    미술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사람들에게 페르메이르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기억되고 있다.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패러디가 될 만큼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지만,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페르메이르가 네덜란드 지역에서 활동했던 17세기 무렵은 ‘더치 페인팅’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는 여러 측면에서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획기적인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 한자동맹의 기반 위에서 자유무역 확대의 수혜를 입은 이 지역은 당대 국가 간 무역을 주도하는 거점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적 시민 계층이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예술 시장에서 작품을 직접 구매하는 새로운 소비층을 형성하였다. 이전까지 교회나 귀족 등 일부 계층에 한정된 주문형 예술 수요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획기적인 변화의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완성된 그림을 사고파는, 이른바 현대적인 의미의 아트 마켓이 처음으로 본격 등장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에서 17세기는 종교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상의 가치를 발견한 시대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회화는 이전 세대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신화나 성경 속의 거대 서사 대신 편지를 읽고, 우유를 따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일상의 미학에 관심을 두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고립된 천재였던 페르메이르도 그런 미학을 보여준 작가 중 하나였는데, 그는 특히 빛의 역할에 주목했다. 동 시대에 활동했던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페르메이르는 그의 여러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빛이 만들어내는 색채와 형태의 여러 모습을 탐구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왼쪽 상단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 그 빛은 정지된 실내 공간의 고요함을 깨우지 않으면서도, 캔버스 위의 모든 사물에 영원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실마리였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정적인 실내 공간에는 그 빛의 따스함 속에 기이할 정도의 평온함과 영원성이 깃들어 있다.

    이와 더불어 당대 화가들이 카메라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원리를 활용했다는 가설은 페르메이르의 작품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마치 렌즈를 통해 맺힌 이미지의 섬세한 잔상을 캔버스에 옮긴 듯한 페르메이르의 회화 기법은 그를 빛의 마술사라 불리게 해주었다. 그 때문인지 페르메이르의 작품에서는 피사체의 윤곽선에 모호하게 맺히는 빛망울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가끔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캔버스 속 인물과 나 사이의 공기 흐름이 순간적으로 정지한 듯한 느낌 속에서, 마치 모든 소음이 소거된 진공 상태에서 감상하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페르메이르가 설계한 완벽한 구도와 정지된 빛의 순간이 만들어낸 밸런스가 관람객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미술적 명상'의 시간이다.

    워싱턴에 이어 뉴욕으로

    두 번째 페르메이르 여정은 뉴욕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작품 다섯 점과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의 작품 네 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메트의 <물항아리를 든 여인(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은 가장 인기를 누리는 작품 하나였지만, 정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프릭에서 만난 <여주인과 하녀(Mistress and Maid)>였다. 이 작품을 보며 나는 문득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작품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카버는 복잡다단한 일상의 단면을 군더더기 없이 잘라낸 후 절제된 표현과 간결한 문장으로 되살린 <대성당> 같은 작품으로 미국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 된 작가이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역시 온갖 다양한 맥락 속에서 만들어졌을 삶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빛과 물감의 도구로 작품에 담아냈다. 그럼 면에서 시대와 매체를 뛰어넘어 두 예술가가 우리 삶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릭과 메트에서 만난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당시 네덜란드에 살았던 어떤 사람들의 일상 속 한 장면을 카버가 소설로 써나간 것처럼 그림으로 담담하게 묘사하며, 그 시간이 만들어지기까지 켜켜이 쌓여왔을 수많은 이야기와 관계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여러 작품을 만나며 보냈던 행복한 시간과 달리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합주(The Concert)>라는 작품의 명패가 붙은 텅 빈 액자였다. 1990년 3월 18일, 성 패트릭 데이 축제가 떠들썩하게 지나간 직후의 일요일 새벽, 두 명의 괴한이 경찰로 위장하여 미술관 벨을 눌렀다. 문을 연 경비원들을 제압한 범인들은 한 시간 남짓 미술관을 돌며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비롯한 렘브란트, 드가, 마네 등 대가들의 작품 13점을 훔쳤다.

    미술관 측은 결정적 제보에 대해 1,000만 달러의 파격적 보상금을 내걸었지만, 작품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당시 사라진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빛의 묘사와 공간의 구성 기법이 절정에 달했던 중기의 걸작 중 하나로, 세 명의 인물이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약 2억 5,000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가장 비싼 도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페르메이르 전작 투어를 하는 애호가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안타까운 심정에도 불구하고, 가드너 미술관에서 작품을 도난당한 자리에 그대로 걸어둔 빈 액자를 만나는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술을 향한 인간의 탐욕이 남긴 상처를 마주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언젠가 돌아올 작품을 기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만나다

    1997년 여름, 나는 학점 교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Utrecht University)에 머물며 여름 학기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있었다. 수업 중 우연히 미술관 경영을 강의하던 교수로부터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 미술관이 곧 대대적인 개보수를 시작하기 때문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는 아카이브로 들어가 몇 년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일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헤이그행 일정을 잡았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나 인터넷 예매 시스템이 나오기 전이라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는 복잡한 여정 끝에 마침내 워싱턴에서 놓쳤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만났다.

    생각보다 한적했던 마우리츠하위스의 전시실에서 그 소녀의 시선에 사로잡혀 거의 30분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그 시간이 불과 며칠 전의 기억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나보다 앞서 350여 년 전에 스튜디오에서 그 소녀와 마주하며 그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작품으로 남기던 화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트로니(Troni, 특정 인물의 초상화라기보다 표정이나 복장을 강조한 인물화) 양식의 이 작품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비견되는 신비로운 미소로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이 작품은 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 전시에서도 대표작으로 주목을 받으며 이후 전 세계적 주요 미술관에서 이어진 대규모 페르메이르 기획전의 시발점 역할을 했지만, 사실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계기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였다.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영화는 영국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페르메이르와 소녀가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상상력을 덧붙여 재구성함으로써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에는 유독 인물화가 많은데, 영화 속의 캐릭터를 통해 비록 작가의 상상 속 이야기였겠지만 피사체로만 등장했던 인물들의 서사를 읽을 수 있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거나 갈등을 빚는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의 마우리츠하위스와 라익스 뮤지엄(Rijksmuseum)에서 만났던 여러 작품들을 떠올리게 했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인물화 중에서도 그림에 담긴 감정의 밀도를 가장 진하게 느낀 작품 중 하나였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차분한 울트라마린 빛깔 옷을 입은 여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표정은 평온해 보이지만 편지를 쥔 손의 긴장감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그녀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감정의 파동을 짐작케 한다. 그 편지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을까?



    다른 한편으로 <델프트 풍경(View of Delft)>이나 <골목길(The Little Street)>처럼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페르메이르의 풍경 작품들은 영화 덕분에 그 느낌이 무척 달라졌다. 반대로 영화 속에 등장한 많은 풍경들이 때로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처럼 스크린을 통해 만났던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이 페르메이르 작품에 맥락적 해석을 덧붙여주니 투어의 즐거움이 한층 깊어졌다.




    배낭 메고 찾아가 만났던 작품들

    네덜란드에서의 여름 학기에 이어 떠났던 베를린, 파리 등에서의 배낭여행은 내게 있어 페르메이르 투어에 다름 아니었다.

    베를린의 게멜데갤러리(Gemaldegalerie),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파리의 루브르박물관(Musee du Louvre) 같은 대도시의 유명 미술관들은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가볼 만한 명소였지만, 브라운슈바이그(Braunschweig)처럼 이름도 생소한 소도시의 헤어조그 안톤 울리히 박물관(Herzog Anton Ulrich Museum) 같은 곳은 <와인 잔을 든 소녀(The Girl with a Wineglass)>가 아니었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찾아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빵 사이에 엔초비 두 마리만 덜렁 들어있는 가장 저렴한 샌드위치로 공원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40킬로그램에 달하던 배낭을 힘겹게 메고 걸어 다니며, 하루 1만5천 원짜리 유스호스텔 벙커베드에서 잠을 자던 쉽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어떤 럭셔리 투어보다 더욱 호사스러운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이런저런 출장과 여행길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관, 드레스덴 고전거장미술관(SKD) 등에서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만났지만, 배낭을 메고 힘들게 찾아가서 마주했던 작품들에 비하면 오히려 감동이 덜했던 것 같다.

    수십 번의 반복 관람으로 행복했던 영국

    런던에서 일하던 3년여 동안은 영국에 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특히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는 사무실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점심시간마다 찾아가 작품을 관람했다. 총 66개의 갤러리에 2,500여 점의 작품이 회화의 역사에 맞게 순차적으로 전시된 이 미술관은 글자 그대로 눈으로 보는 미술 교과서라 할 만한 곳이었다.

    그래서 런던에 머무는 동안에는 연대기별로 미술사 책을 찾아 읽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와 작품에 대해 미리 공부한 후, 하루에 전시실 두세 개씩을 돌아가며 관람하는 일정을 3년 내내 계속했다. 귀국 무렵에 정리해보니 이 미술관을 찾은 것이 총 160여 회에 달했다.

    그 덕분에 17세기 네덜란드 전시실에 있던 페르메이르의 두 작품,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A Lady Standing at a Virginal)>과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여인(A Lady Seated at a Virginal)>은 수십 번 이상 관람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 밖에도 켄우드 하우스(Kenwood House), 윈저성 로열 컬렉션(Royal Collection),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국립미술관 등에 페르메이르 작품이 소장되어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찾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더블린에서 오사카까지,
    수천 킬로를 넘어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퍼즐 조각


    하지만 페르메이르 투어의 종착역으로 삼았던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의 <편지 쓰는 여인과 하녀(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 관람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맞이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2018년 겨울, 마지막 남은 한 점을 보기 위해 아일랜드 더블린을 찾았다.

    그런데 국립미술관 전시실의 그림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작은 엽서 크기의 복제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페르메이르 특별전을 위해 대여 중이라는 친절한 안내문이 함께 붙어 있었다. 미리 대여 전시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 내 불찰이었다. 결국 아일랜드 여정은 기네스박물관에서 맥주로 허망하게 속을 달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2019년 초, 나는 마지막 작품을 찾아서 다시 일본 오사카로 향했다. 시립미술관 복도를 메우며 늘어선 줄 속에서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워싱턴에서 시작하여 이어온 24년의 세월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블린에서 놓쳤던 작품 <하녀와 함께 편지를 쓰는 여인(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을 마침내 마주하면서 오래도록 간직해온 염원과 갈증이 바다를 여러 번 건너 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비로소 해소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온몸으로 느껴지던 그 묘한 성취감과 해방감은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다시없을 경험이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행복 심리학자 에드 디너는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결정한다고 말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싣고, 기차 창밖을 응시하며 보낸 시간들. 그 24년의 세월 동안 내가 쫓은 것은 단지 캔버스 위에 물감이 칠해진 그림 몇 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페르메이르가 작품을 만들며 발견했던 빛의 궤적처럼 나는 그의 작품에서 나의 일상을 비출 작은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기꺼이 여정을 떠났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누린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순간들이었다. 그 순간들이 내 삶에 빈도 높게 쌓이며 나의 일상을 메마르지 않는 충만함으로 가득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페르메이르가 바라보던 창문에서 쏟아지던 그 빛은 이제 그의 작품을 넘어서 나의 긴 여행 끝자락에 조용히 내려앉아 내 삶을 채우고 있다.

    에필로그

    금년 여름,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Nakanoshima Museum of Art)에 가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만날 수 있다. 새롭게 준비되는 특별전을 위해 이 작품이 14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나들이를 오는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번 기회에 가까운 곳에서부터 나만의 빛을 찾아 페르메이르 투어를 한 번 시작해보길 권한다.

    운 좋게 언젠가 1995년의 내셔널 갤러리 전시나 2023년 라익스 뮤지엄의 전시처럼 대규모 특별전을 관람할 기회가 있다면 물론 좋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먼 도시를 하나하나 찾아가서 만나는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아마 그 어떤 버킷 리스트보다도 삶에 충만한 만족감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용호성 문화예술평론가·前 문체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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