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해 토지를 매입했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했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해(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해 광동 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백범일지>에 ‘적힌 그대로’ 상황 설명을 하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공산혁명 노선과 대통령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노선 등으로 갈라져 있었다. 임정 국무회의에서는 여운형·안공근·한형권 3인을 러시아에 대표로 보내려는데, 금전이 입수된다는 사실을 포착한 이동휘가 자기 심복 한형권을 앞서 밀파한다. 볼셰비키 혁명정부 최고지도자 레닌은 200만루블 상당 금괴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에’ 지급하기로 결정한다. 한형권이 그 1차분 40만루블어치 금괴를 가지고 시베리아에 도착하는 것에 맞춰 이동휘는 김립을 추가로 밀파해 한형권을 종용, 금괴를 임정에 바치지 않고 빼돌린다. 총리직을 사직한 이동휘는 러시아로 도주하고, 김립은 임정 독립운동 자금으로 저런 짓을 저지른다.
이에, 1922년 2월 10일 오후 1시경 상하이 갑북 보통로에서 “정부의 공금횡령범 김립은 오면직과 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하니 사람들이 통쾌하게 생각했다”라고 김구는 적고 있다. 임정 국무원 전 비서장이자 고려공산당 서기장 김립은 그렇게 대낮에 총탄 12~13발을 난사당했다. <백범일지>가 그랬다고 하니 과거와 현재의 한국인(과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그러나 팩트는 다르다. 40만루블은 지금으로 치면 약 510억원, 200만루블은 2550억원에 달한다. 이걸 레닌은 물론이요 볼셰비키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조직)이 허술하게 둘 리가 만무하다. 이들은 이 사건의 특별감사관으로 극동공화국 외무장관 출신 야코프 얀손을 지명했다. 그는 수사의 전권과 잔여금에 대한 몰수권까지 위임받았다. 1922년 8월 18일 이른바 <얀손보고서>가 제출된다.
1920년 9월, 40만루블의 수령자는 임정 대표 한형권이 아니라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준 게 아니라 고려공산당 상해파에 지급된 것으로, 결산과 보고 의무도 한인사회당과 그 후신인 고려공산당 상해파에 있으며 사적 유용과 횡령 따윈 없었다. 오히려 자금이 독립군 양성, 잡지 발간, 선전 활동 등 공적 목적에 투명하게 쓰였음을 영수증으로 확인했다. 나아가, <얀손보고서>와 함께 코민테른 문서보관소(현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RGASPI)에 소장돼 있는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 쿠시넨이 작성한 훈령은 2차분 20만루블, 약속된 총액 200만루블이 공히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것임을 확인해준다. 이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공문서 가운데 외무차관 카라한이 작성한 전보에서도 교차 확인된다.
애초에 소비에트 혁명정부가 미국에 경도된 이승만, 안창호 세력이 주도하는 임정에 그 막대한 자금을 공여한다는 건 맞지가 않다. 백범이 언급한 공금횡령 사건은, 공산당 내 고려공산당 상해파에 대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파벌적 중상모략을 적극 수용해 ‘사용한’ 결과다. 기실 오면직과 노종균은 김구의 제자였고, 이유가 오해였든 ‘무엇이었든’ 간에 이 둘에게 김립 암살을 명령한 이로 임정 경무국장 김구가 지목돼 왔다. 김립은 조선총독부가 ‘배일흥한(排日興韓)’의 대표적 인물로 적시한 뛰어난 항일혁명가였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거짓과 오류에 오염된 ‘텍스트 자체’와 유독 그런 사례가 많은 한국적 상황에 대한 ‘자각’일 뿐이다. 심지어는 서울대 교수인 한 역사학자의 사례처럼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끼워맞추기 위해 원천 자료를 조작하는 짓도 적잖다. 남한에서 지속돼온 ‘지식인형 기만’의 패턴이자 ‘거짓의 카르텔’이다. 이러니, 역사(기록과 기억)에 대한 팩트체크와 해석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현실에 반영돼야 한다.’ 검열당하거나 금지돼서는 안 된다. 진실은 시간이 흐르면 드러나기 마련이라는데, 그조차 믿기 힘든 세상이다. ‘시간의 정화작용(거짓을 가려내는 일)’을 억압하는 사회는 안 망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