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대통령’. 국민연금에 붙는 수식어는 과장이 아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보유액은 약 263조원, 시가총액으로는 8~9%다.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만 260여 곳이다. 국민연금 표심이 주주총회 캐스팅보트이자 소액주주 표심의 풍향계로 통하는 이유다. 국민연금의 결정이 ‘가이드라인’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하지만 26일 열린 한진칼과 신한금융지주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잣대는 시장과 크게 엇갈렸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은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나란히 통과됐다. 조 회장 선임안은 93.77% 찬성으로 가결됐다. 진 회장 연임안도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래스루이스의 찬성 권고 속에 무난히 통과됐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의 판단이 경직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한 독과점 우려 등을 들어 조 회장 선임안에 2021년과 2024년 대한항공 주총, 올해 한진칼 주총까지 세 차례 반대표를 던졌다. 진 회장에게는 신한은행장 시절 라임 사태로 받은 경징계인 ‘주의적 경고’를 근거로 2023년과 올해 연임 안건에서 연속 반대했다. 수년 전 문제를 계속 문제 삼는 ‘반복 비토’다.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로 주주가치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국민연금의 의도는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과거 흠결만 붙들고 이후 성과와 변화를 외면하는 건 곤란한 일이다. 진 회장 취임 후 신한금융은 역대 최대 실적을 이어갔고 주주환원율은 50% 이상으로 상승했다. 조 회장은 올해 말 통합 대한항공 출범이라는 중대 과제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연금의 채점표는 여전히 과거에 멈춰 서 있다.
이런 엇박자는 국민연금 구조에서 비롯됐다. 국민연금은 기업을 분석·투자하는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 행사를 결정하는 외부 위원 중심의 수책위가 분리돼 있다. 기업을 가장 오래 들여다본 조직과 가장 강한 무기를 쥔 조직이 따로 존재한다. 반면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은 투자와 의결권, 책임을 한 축으로 묶어 움직인다. 국민연금의 투자 판단과 의결권 행사가 분리되면 시장과의 괴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 최대 기관투자가의 역할은 기업인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는 게 아니다. 과거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성과와 쇄신 노력을 정교하게 재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시장에 의미 있는 신호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