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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국부터 산딸기까지…영월 자연이 차린 '왕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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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국부터 산딸기까지…영월 자연이 차린 '왕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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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팀’이라는 이름은 대중에게 생소할지 모른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되지만, 여전히 음식은 소품의 일부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카메라 앞에 놓이는 음식 하나에도 시대적 고증과 연출의 의도 그리고 배우의 감정선을 담아낸다. 시대극에서는 역사의 숨결을, 현대물에서는 캐릭터의 성격과 삶의 궤적을 접시 위에 구현한다. 이를 위해 제작, 연출, 미술팀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전체적인 배경색과 그릇의 기물까지 맞추는 세밀한 공정을 거친다. 그 치열한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촬영장에서 푸드팀의 ‘요리 마술’이 시작된다.

    현장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분투하고, 때로는 배우의 손 대역을 자처한다. 조리하는 신을 촬영할 때는 동선을 짜고, 완성된 음식의 형태를 관리한다. 누군가는 묻는다. “음식 감독이 따로 있어요?” 그렇다. 있다. 카메라 렌즈 너머, 식탁에 흐르는 찰나의 분위기 역시 연출의 일부다. 1500만 관객 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이 받아드는 식탁에도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는 영화의 첫 장면. 경복궁 사정전 안, 단종의 마지막 수라상이 차려진다. 장항준 감독은 붉고 둥근 대원반(大圓盤)에 화려하되 차갑고, 풍성하지만 외로운 밥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반짝이는 유기에 담긴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 단종의 모습은 곧 닥쳐올 비극을 직감한 소년 왕의 쓸쓸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유배지 영월에서 마주한 밥상은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단조롭지만 정이 넘치는 풍경으로 대조를 이룬다. 궁궐 수라상이 완벽하되 서늘했다면, 영월의 밥상은 단순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이 ‘온도의 차이’를 음식으로 치환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영월 장면의 음식은 모두 ‘강원반’에 올렸다. 장식이 거의 없고 구조가 단순하며 상판이 두껍고 다리가 낮은 강원반의 소박함은 산간 마을의 척박한 삶과 닮아 있다. 대원반 위 유기가 정돈된 궁궐의 수라와 강원반에 투박하게 놓인 마을 사람들의 음식. 그 극적인 대비를 소반 하나로 완성하고자 한 것이다.


    영월의 밥상을 구성하면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 1450년대 산골 마을 사람들이 차려낼 법한 음식은 화려해서도, 구하기 어려워서도 안 됐다. 산과 강이 거저 내어준 것 그리고 투박한 부뚜막에서 정성껏 빚어낼 수 있는 것들이어야 했다. 극 중 단종이 마을 사람들과 식사하며 음식 하나하나에 깃든 사연을 묻는 장면이 있는데, 그 메뉴를 구성할 때도 세밀한 고증을 거쳤다.

    어죽과 다슬기국은 내륙 강가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즐기던 보양식이다. 특히 서강에서 손으로 건져 올릴 수 있던 다슬기는 영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식재료였다. 이 두 음식은 밥상에서 국물의 온기를 담당하는 영월의 정서 그 자체였다.



    산초 무침은 알싸하고 독특한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이 밥상의 유일한 향신 채소였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선택한 토끼 저민 고기는 조선시대 강원 산간에서 구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귀한 육류 반찬으로 올렸다. 산삼 뿌리는 구성 단계에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메뉴다. 너무 귀한 식재료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영월 일대 깊은 산에서 산삼이 났다는 기록이 실재한다. 무엇보다 유배 온 어린 왕에게 가장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었을 민초들의 마음을 이 산삼 뿌리 하나에 담고 싶었다.

    산딸기는 계절이 허락한 선물이다. 단종이 영월에 머물던 시기는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강원 산자락에 산딸기가 붉게 익는 계절이다. 별다른 조리 없이 그릇에 소담하게 담아낸 산딸기 한 줌은 이 밥상의 유일한 단맛을 책임진다. 이 소박한 음식들이 강원반 위에서 마음으로 연결되는 장면은, 음식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의 온기가 이어지는 숭고한 순간이다. 관객은 화려한 수라상보다 이 투박한 밥상에서 더 진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를 비롯해 100여 편의 작품을 거치며 얻은 확신이 하나 있다. 음식은 단순한 시각 소품이 아니라 장면의 공기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언어라는 점이다. 이제 세계가 K콘텐츠를 통해 우리의 음식을 목격한다. 척박한 유배지에서도 피어났던 한식 특유의 따뜻한 정서가 스크린 너머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날을 기대해 본다. 화려한 미장센보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의 힘이 더 강렬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혜원 푸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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