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최근 3년간 본 ‘로미오와 줄리엣’만 해도 여러 편이다. 2024년 5월에는 영화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톰 홀랜드가 로미오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제이미 로이드 연출의 작품이 있었고, 2023년 8월에는 매튜 본이 현대적인 설정과 파격적인 춤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같은 해 7월, 알메이다 극장을 촛불로 채워 아름답고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선보인 레베카 프렉널 연출 작품부터 여름날 교회 정원에서 열린 유랑극단 버전까지, 이 작품은 정말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2026년 3월, 런던의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공연 중이다. 역사적인 목재 건물 곳곳을 그래피티로 채우고, 자전거 묘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러닝타임은 90분으로 압축되었고, 타악이 더해지며 보다 경쾌하고 직관적으로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오늘날 런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무대에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추방당한 로미오는 침낭을 펴고 노숙한다. 원작에서는 전해지지 못한 편지 때문에 운명이 엇갈리는데, 이 작품에서 로미오는 자전거 탄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소매치기당해 중요한 연락을 받지 못한다.
싸움 끝에 숨이 멎은 머큐쇼 위를 자전거로 뛰어넘고, 휴대전화를 꺼내 인증 사진을 찍는 장면은 타인의 고통조차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하는 이 시대의 단면을 드러낸다. 피를 흘리는 몸 앞에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서로를 찍어주는 모습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이미 줄리엣과 결혼해 싸움을 피하려 했던 로미오가 자신의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한 티볼트를 찌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위태로운 자전거 묘기는 아무 계산 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청소년들의 감정을 드러내고, 모든 인물의 죽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은 압축된 이야기 속에서도 이 이야기가 비극임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또 하나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3월 18일 막을 올렸다. “한순간 속에 수많은 날들이 담겨 있다.(In a minute there are many days.)”는 줄리엣의 대사를 내세운, 연출가 로버트 아이크의 작품이다.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았지만, 이번 프로덕션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예매가 시작됐을 때 알려진 정보는 연출가와 작품명, 그리고 캐스팅된 배우들뿐이었다. 이번 프로덕션은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의 세이디 싱크(Sadie Sink, 2002)와 영화 「햄넷」의 노아 주프(Noah Jupe, 2005)를 내세웠다. 두 배우의 웨스트엔드 데뷔작이며, 주프에게는 무대 데뷔작이다.
아역 배우로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놀라울 만큼 생생하고 어린 커플을 만들어냈다. 두 배우는 젊음이라는 매력을 한껏 발산하며, 이 작품의 홍보가 두 사람만으로 이루어졌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했다.

로버트 아이크(Robert Icke, 1986)는 2016년 로런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연출상을 수상한 최연소 수상자로, 영국 연극의 희망이라 불리는 작가 겸 연출가이다. 2024년 런던 웨스트엔드 윈덤 극장에서 현대 정치 스릴러처럼 재구성한 ‘오이디푸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이디푸스’에서도 디지털시계를 무대 중앙에 배치해 줄어드는 시간을 눈에 띄게 했는데,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도 역시 디지털시계가 등장한다. 두 개의 커다란 패널은 좌우로 움직이며 교차하고, 시간을 거꾸로 비추거나 나란히 보이면서 요일과 시, 분, 초를 표시해 시간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가장 인상적인 연출은 마치 영화 같은 되감기 장면들이었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한순간 번쩍이면, 장면은 조금 전으로 되돌아간다. 마치 기억이 지워진 듯, 이전 상황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된다.

잠깐의 차이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로미오가 조금만 늦게 무덤에 도착했다면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 연출은 삶과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는 순간을 포착하며, ‘우연’이라는 찰나의 차이가 비극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버트 아이크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사우샘프턴 너필드 극장에서 선보인 공연은 청소년의 내면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랑에 빠진 줄리엣은 긴 머리를 흩날리며 기쁨에 뛰어오른다. 로미오는 줄리엣에게 멋있게 보이려 애쓰지만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 애태웠던 로잘라인은 금방 잊어버린 채 줄리엣에게 한눈에 빠져버리는 로미오의 모습은 십 대 특유의 감정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감정을 천천히 쌓아가기보다 한순간에 몰입한다.

머큐쇼는 노골적인 행동과 장난으로 웃음을 유발하지만, 맨 엉덩이를 보이거나 바지 앞섶을 쥐고 유모를 농락하는 등 지나친 행동으로 화를 부르는 인물이다. 티볼트의 칼에 찔리고서도 별것 아닌 상처인 것처럼 농담하다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로미오에게 원망과 독설을 쏟아내며 죽는다.
줄리엣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따뜻하고 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갑자기 돌변하며 폭력성을 드러내고, 유모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모습은 큰 충격을 준다. 결국 유모마저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라는 현실적인 선택을 권하자, 의지할 곳을 잃은 줄리엣의 선택은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로버트 아이크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새로운 캐스팅과 해석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2026년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지금의 언어로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 셰익스피어를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미세한 오차가 비극을 만든다는 사실을 시각화해 이 작품이 운명적인 비극이 아니라 한순간의 엇갈림이 만들어낸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역시 수많은 엇갈림 끝에 도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련던=정재은 칼럼니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2026) 트레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