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5000만명 남짓한 국가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인구 대비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18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372만명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현재 관객 증가 추세를 감안할 때 4월 말까지 상영을 이어갈 경우, 영화 명량의 국내 최다 관객 기록(1761만명)을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왕사남에는 이렇다 할 스펙터클한 장면이 없다. 그런데도 1300만 명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왕위에서 쫓겨난 뒤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자신을 따르던 이들마저 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비극을 겪은 단종의 이야기를 그린다. 유배지인 강원 영월 광천골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단종의 애달픈 서사는 어렵지 않게 관객에게 다가가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노산군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과정에 있다. 그는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군주의 자세를 되찾아가며 국가의 대표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메시지는 영화 ‘변호인’에서 “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대사로 깊은 울림을 남긴 변호사 송우석의 서사와도 닮았다. 단종의 비극적 삶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애도하지, 못해왔다는 일종의 뒤늦은 죄책감 역시 숨은 흥행 요인으로 작용했다. ‘왕사남’이 겨냥한 것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지닌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도, 사육신을 처단한 세조의 잔혹함도 아니었다. 영화의 중심은 단종의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에 맞춰져 있다. 이 같은 서사 구조 속에서 악역은 한명회 한 명으로 충분했다.
애도의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엠넷’은 ‘햄릿’의 내용이 아니라 죽은 아들 엠넷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뒤늦은 애도에 있다. 애도가 슬픈 것은 늘 늦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엄흥도가 노산군의 마지막 임종을 도와주고자 활줄을 당기면서 “이제 강을 건널 때입니다”라고 절규하는 장면, 꽁꽁 묶여 차가운 강에 버려진 노산군의 시신을 남몰래 수습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관객도 함께 애도의 정서를 느낀다. 그 감정의 밀도 앞에선 영화의 구성적 완성도가 허술하다는 비판이 크게 힘을 얻지 못한다.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눈물 없이 애도하기 어려운 인간의 보편적 경험과 맞닿아 있다.
많은 사람이 영월 청령포와 장릉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에서 몸으로 애도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마마, 우리의 애도가 너무 늦었습니다’를 외치며 속으로 목놓아 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애도는 미룰수록 더 깊어지고, 울어야 할 때 충분히 울어야 후회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일시다. 관객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바로 자기 내면 깊이 있는 슬픔과 마주하는 순간, 놀라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왕사남’이 1300만 관객을 끌어모은 마지막 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관점에서 보면 애도는 과거가 현재의 시간을 계속 찢어놓는 상태다. 숙종이 억울하게 죽은 조상 노산군을 240년 뒤 단종으로 복위시킬 때의 심경 역시, 바로 애도의 소환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