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전환사채(CB)든 유상증자든 자금 유치 얘기를 아예 꺼내지도 못합니다.”최근 만난 한 기업 자금 담당 임원은 “인공지능(AI) 투자를 확대하라는 요구는 커지고 있는데, 정작 이를 위한 자금은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같이 하소연했다.
이 기업뿐만이 아니다. 삼성SDS는 지난 18일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CB 발행 한도를 기존 670억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확대하는 정관 변경안을 마련했다. 주가에 부담을 주는 전환사채 발행 한도가 숫자상으론 22배 늘어나는 것이지만, 기존 한도가 시가총액(약 12조원)의 0.5% 수준에 불과해 회사 규모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정관 변경이 당장 CB를 발행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한도가 너무 낮으니 이를 조정만 한 것이다. 그런데도 시장의 눈치를 먼저 살펴야 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시장에선 “CB 발행 한도를 22배나 한꺼번에 늘리는 건 너무하다. 상승세의 코스피에 찬물을 끼얹는 기업”이란 말도 나왔다. CB는 부채로 인식되지만 일정 조건에선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어 발행되면 주식 수가 늘어 주가가 낮아질 수 있다. 투자자 사이에서 CB란 단어가 나오기만 해도 부담스럽게 보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유다.
하지만 삼성SDS는 이 조치가 불가피한 경영 판단에 가깝다. AI 데이터센터 구축, 국가AI 컴퓨팅센터 프로젝트, 그래픽처리장치(GPU) 매입 등 수천억~수조원 규모의 투자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어서다. 막대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기업 입장에선 미래 수익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미리 확보해 두는 건 당연한 선택이다.
대규모 AI 인프라 투자가 예정된 SK텔레콤과 KT 등 통신사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SDS 같은 우려를 받을까 봐 주식과 연계된 자금 마련을 최대한 피하고, 사내 사업부를 매각하거나 차입을 대신 택하고 있다. 투자금을 미래 기회 및 재무 안정성과 맞바꾸고 있는 것이다. 해당 기업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주주가치 제고를 강조하며 주가 부양에 힘을 쏟고, 투자자도 이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확산하다 보니 자금 조달 계획을 짜는 데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며 “특히 유상증자나 CB 발행 등 주식과 연관된 투자금 마련 방법은 회사 차원에서 초기부터 제외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이런 기조는 우리 기업의 미래를 위한 투자 타이밍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속도전’인 AI 개발 경쟁에서 필요한 자금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 기업은 까마득히 뒤로 처지거나 결승전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