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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는 고유가 상황에도 중동 산유국 경제는 극심한 자본 이탈 위기에 처했다. 중동 분쟁의 지정학적 위기가 급격히 커지면서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중동 경제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걸프 국가의 자본 유출 우려
2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 글로벌 레이팅스는 지난 17일 심층 스트레스 테스트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무력 분쟁이 심화하고 장기화할 경우에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GCC 6개국 은행에서 최대 307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국내 예금의 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보통 국제 유가가 오르면 중동 산유국들은 이른바 '오일머니'를 쓸어 담으며 경제 호황을 누린다. 하지만 최근 중동의 고유가는 단순히 석유 생산량을 줄여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미사일과 무인 드론이 핵심 에너지 시설과 산업 기반을 직접 타격하는 전쟁 상황이기 때문이다.
생존이 위협받는 공포 속에서 부유층과 글로벌 투자자들은 중동 은행에서 앞다퉈 돈을 빼내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무 구조가 상대적으로 취약하거나 외부 외화 부채 의존도가 높은 바레인 등의 은행에서 예금이 대거 인출돼 역내 최상위 우량 은행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아예 중동 지역을 벗어나 스위스, 뉴욕 등 역외 안전 자산으로 급격히 빠져나갈 가능성도 있다.
최근 중동 지역의 금융 시장 불안이 통제 불능 수준으로 치닫자 아랍에미리트(UAE)는 선제적 방화벽 구축에 나섰다. 아랍에미리트 중앙은행(CBUAE)은 약 1조 디르함(약 2700억 달러) 규모의 막대한 자산과 외화보유액을 백스톱(최후의 보루)으로 삼은 ‘금융기관 복원력 패키지’를 승인하고 가동했다.

해당 패키지는 은행권의 혈맥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글로벌 바젤 규제 체계를 전시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변형했다. 통화정책 조치로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예치해야 하는 현금지급준비금 의무분의 최대 30%에 대한 접근을 허용했다.
디르함화(AED)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축 통화인 미국 달러화로도 이용할 수 있는 기간 유동성 창구를 전면 개했다.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적용해오던 주요 건전성 규제도 한시적으로 완화했다.
자금 조달 시장이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은행들이 기업과 가계에 대한 대출 공급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우선 유동성 규제부터 풀렸다.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과 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은 은행이 단기 및 중장기 자금 유출 상황에 대비해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지표다. 당국은 이 기준을 일시적으로 낮췄다. 은행이 보유 자금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출 여력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자본 규제도 함께 완화됐다. 경기대응완충자본(CCyB)과 자본보전완충자본(CCB)은 금융위기 등 불확실한 상황에 대비해 은행이 추가로 쌓아두는 자본이다. 평상시에는 잠재적 부실에 대비한 ‘안전판’ 역할을 하지만, 이번 조치로 해당 자본 일부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은행의 대출 확대 여지가 커졌다.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들은 투자자 노트를 통해 “어려운 시기에 유동성과 자본 측면의 일시적 완화를 제공해 단기 심리에 긍정적이며, 이런 자본 해제 조치가 은행들의 가용 자본 완충 여력을 최대 3% 포인트 넓힐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중동 당국의 조치에 시장에선 안도 랠리로 이어졌다. 2월 말 전쟁 발발 이후 폭락을 겪었던 주요 은행주들은 패키지 발표 직후 강한 반등세를 보였다. 에미레이트 NBD는 장중 9% 이상 상승했고, 아부다비 상업은행(ADCB) 등 선도 은행들의 주가도 회복세를 보였다.
커지는 전쟁 피해
하지만 금융 시장의 일시적인 안정화에도 실물 산업 현장이 받는 타격의 강도는 높아졌다. 가장 치명적인 손실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중추인 카타르에서 발생했다. 사드 알카아비 카타르에너지 최고경영자(CEO)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이번 공격으로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능력의 17%가 훼손됐고, 연간 1280만 톤이 3~5년 동안 가동 중단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핵심 에너지원의 수출 마비는 나프타, 황, 헬륨 등 파생 원자재의 생산 급감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글로벌 제조업 생태계 전반을 위협하고 있다.디지털 및 금융 인프라도 위협받고 있다. 아마존웹서비스(AWS)의 UAE 및 바레인 지역 데이터센터 일부가 드론 공격을 받았다. 미국 대형 기술기업의 해외 핵심 클라우드 인프라가 군사 행동으로 직접적인 가동 차질을 빚은 최초의 사례다.
글로벌 투자은행 씨티그룹은 대규모 중동 익스포저를 관리하는 현지 직원을 전원 원격근무 체제로 돌리고 두바이국제금융센터(DIFC) 등 핵심 상업 지구의 사무실을 일시 폐쇄했다.

시장에선 걸프 지역 금융 시스템의 펀더멘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걸프 은행들이 과거 수십 년간 오일 호황기를 거치며 축적한 대규모 자본이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S&P 글로벌 레이팅스는 예금 유출 위험을 강하게 경고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위험은 관리할 수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S&P에 따르면, GCC 은행들은 뱅크런 등 극단적인 예금 인출 요구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1차 방어선인 현금 및 중앙은행 예치금을 약 3120억 달러로 추정했다.
은행들이 보유 중인 우량 투자 포트폴리오 자산을 20%의 가치 삭감 손실을 감수하는 시나리오에서도 약 6300억 달러의 2차 유동성 대응 자금을 자체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차 가용 현금과 2차 자산 청산액을 합치면 9420억 달러를 이상의 가용 유동성이 있다. S&P가 예측한 최대 예금 유출 리스크인 3070억 달러를 세 배 이상 초과 방어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장기적인 실물 경제 침체와 부실 채권 증가까지 한 번에 완벽히 막아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은행이 규제 완화로 회계적 자본 여력을 확보해도 민간 기업이 신규 투자를 단행하고 관광 수입이 늘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항만과 공항 폐쇄가 장기화해 외국인 투자 자본과 노동력이 일제히 이탈할 경우에는 비석유 부문 중소기업과 대형 프로젝트에서 흑자 도산이 발생할 수도 있다,
달러 페그제의 한계
고유가와 자본 이탈 공포가 동시에 덮친 상황에서 걸프 지역 중앙은행들은 기준금리 인하라는 전통적인 거시경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지준율 완화와 거시건전성 해제'라는 복잡한 우회로를 선택했다. 이유가 있다. '달러 페그'라는 국제 통화 체제의 족쇄 때문이다.GCC 6개국 중 통화 바스켓에 연동하는 쿠웨이트를 제외한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 5개국은 자국 통화의 가치를 미국 달러화에 완전히 고정하는 '하드 페그제'를 수십 년간 채택하고 있다. 국가 수출입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원유 수출 대금의 환율 변동성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다.
UAE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대폭 인하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미국의 높은 금리와 걸프의 낮아진 금리 사이에서 금리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수익률을 좇는 글로벌 자본이 걸프 역내를 빠져나가 미국으로 유출되는 금리 차익 거래가 발동한다. 이는 외국 자본의 유출을 부추겨 환율 방어망인 수천억 달러의 외화보유액을 순식간에 고갈시킬 수 있다.

위험 요인은 또 있다. 유가 급등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하면서 미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하 사이클을 지연시키고 있다. 지난 18일 Fed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방기금금리 목표 범위를 3.50~3.75%로 동결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단기적으로 높은 에너지 가격이 전체 인플레이션을 밀어 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연준이 이른바 '매파적 동결' 결정을 내리자 달러 페그제의 묶인 UAE 중앙은행 역시 같은 날 자국의 기준금리를 3.65%로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전쟁의 위험이 커지고 자국 상업 은행이 대규모 뱅크런 위기에 처했지만 미국의 통화정책에 묶여 기준금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원·달러 환율은 한국 경제의 심리 저항선인 1500원 벽을 뚫었다. 한국은 전체 수입 원유의 70% 정도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다. 해당 수입 물량의 95%가 최근 군사 충돌의 중심 지역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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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