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장이 이전에 비해 많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제작되는 편수도 확실히 많이 줄었고요.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가 잘된 후 '다시 잘해보자'는 분위기예요. 좋은 작품들도 여러 개 있고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45일 만인 지난 20일 1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해,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고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 만큼 극심한 보릿고개를 지나온 한국 극장가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빅 히트'다. 그리고 영화계는 '왕과 사는 남자'의 뒤를 잇는 흥행작이 어떤 작품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는 분위기다.
단종과 엄흥도, 그리고 1400만의 비밀

'왕과 사는 남자'는 지난 2월 4일 설 연휴를 겨냥해 개봉했다. 장항준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첫 사극 도전작이다. 줄거리는 단순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단종의 영월 유배다. 하지만 엄흥도라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에 주목하며 차별화를 꾀했고, 그동안 나약한 왕으로 그려졌던 단종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전 세대가 공감하고 찾을 수 있는 영화가 완성됐다.
엄흥도는 몇몇 역사책에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인물이다. 장항준 감독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삼족이 멸해질 위험을 감수했는지, 그 빈칸을 따뜻하고도 슬픈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여기에 믿고 보는 배우 유해진, '눈빛이 보물'이라는 평을 받는 박지훈이 각각 엄흥도와 단종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흥행 공식을 노린 뻔한 전개, 틀에 박힌 캐스팅"은 한국 영화를 외면해 온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해 온 문제였다. '왕과 사는 남자'는 신선한 시선과 적절한 캐스팅을 택하면서 개봉 첫날 11만명을 시작으로, 5일 만에 100만, 14일 만에 300만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260만명)을 거뜬히 넘겼다. 지난 6일에는 천만 관객을 달성해 국내 개봉작 중 34번째 천만 영화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 영화로만 보면 25번째다. 사극 장르로는 네 번째 천만 영화다.
오랜만에 나온 1000만 영화, 다른 곳도 들썩
영화 '파묘'(관객수 1191만명), '범죄도시4'(1150만명) 이후 2년여 만에 나온 1000만 영화라는 점에서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효과는 영화를 넘어 곳곳에서 포착됐다. 100여년 전에 나온 이광수 소설 '단종애사'가 다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고, 단종의 유배지이자 영화 촬영지인 강원도 영월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숙박·음식점업 등 매출이 50%가량 급증했다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발표도 있었다.
여기에 아이돌로는 정상의 위치에 올랐지만, 배우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던 박지훈은 단숨에 흥행력과 연기력을 고루 갖춘 '특A급' 연기자로 등극했다. 박지훈이 과거 출연했던 작품들은 물론 차기작의 원작 웹툰까지 역주행을 일으키면서 영향력을 입증했다.
대작 줄줄이 남은 하반기, 승자는 누구?
오랜만에 불어온 훈풍에 영화계도 활기를 띤 모습이다. 극장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반기로 넘어간다.
올해 남은 라인업 중 가장 주목도가 높은 작품은 단연 나홍진 감독의 '호프'(HOPE)다. '추격자', '황해', '곡성'으로 스릴러와 오컬트 장르의 역사를 새로 쓴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황정민이 비무장지대 인근 외딴 항구마을 호포항의 출장소장 역을 맡고, 조인성, 정호연,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등이 합류했다. 제작비만 약 7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손익분기점이 관객 1000만명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다. 다만 해외 판매 등도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만큼 '호프'가 얼마나 수익을 거둘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는 상황이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도 하반기 기대작 중 하나다. 11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배우 전지현을 필두로 구교환, 지창욱, 신현빈이 출연한다.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로 봉쇄된 건물 안, 고립된 생존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감염자들에 맞서는 이야기다. '부산행'으로 이미 장르의 공식을 검증받은 연상호 감독이 다시 좀비·감염 계열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관심이 쏠린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2'도 올 하반기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1424만명을 동원한 1편의 후속편으로, 파독 광부 출신 아버지 성민(이성민 분)과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아들 세주(강하늘 분)의 이야기를 담는다. 윤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일반인 모니터링 점수가 1편보다 높게 나왔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천만 영화의 후속편이라는 점에서 기본 관객층이 탄탄하다는 강점이 있다.
'타짜: 벨제붑의 노래'도 올해 라인업에 들어 있다. 배우 변요한과 노재원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타짜' 네 번째 시리즈다. 시리즈 IP를 재소환하는 방식이지만 전편들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신작의 차별화가 숙제다.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와 손재곤 감독, 배우 강동원이 만난 코미디 영화 '와일드 씽' 등도 개봉 일정을 저울질하고 있다.
'왕과 사는 남자'가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면서 지난 19일 기준 누적 매출액은 약 1346억원이 됐다. 지난해 한국 영화 전체 매출액이 4191억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3분의 1에 달하는 수치다. 업계 관계자들은 "'왕과 사는 남자'가 많은 매출을 거뒀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제작사, 투자사, 배급사가 가져가는 구조는 아니다"면서도 "그래도 '어렵다', '힘들다'는 말만 나왔던 상황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관객들이 다양하게 즐길 수 있고, 호감도 높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게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된 거 같다"며 "이러한 트렌드를 공식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지만, 개봉 시기나 사회적인 분위기 등까지 맞아떨어진다면 폭발적인 파급력이 생길 수 있는 만큼 또 한 번의 1000만 흥행도 가능하리라고 본다"고 기대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