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 보여주는 제조업의 세계는 거대하고 정교하다.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 수천 리터의 물이 쓰이고, 스마트폰은 수많은 국가를 거쳐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여정을 지나 손에 들어온다. 케이크, 화장지 같은 일상용품부터 비행기와 의약품까지, 거의 모든 물건이 글로벌 네트워크 속에서 생산·운송·소비된다. 이 시스템은 너무나 잘 작동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존재조차 의식되지 않는다. 저자가 이를 “하수처리 시스템처럼 보이지 않는 필수 인프라”라고 표현한 이유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교함이 동시에 취약성이라는 점이다. 책은 현대 제조업이 추구해온 ‘저비용·고효율’ 전략이 초래한 구조적 약점을 낱낱이 짚는다. 2020년 코로나19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화장지 대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사람들은 “공장이 멈춘 것도 아닌데 왜 휴지가 없느냐”고 의아해했다.
원인은 ‘아웃소싱’과 ‘재고 최소화’에 있었다. 사무실과 공공시설에서 쓰이던 상업용 화장지 수요는 줄고, 가정용 수요는 급증했지만 생산 라인을 즉각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상업용과 가정용 제품은 규격과 포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장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특정 공정에만 최적화돼 있었고, 갑작스러운 수요 변화에 대응할 ‘플랜 B’가 없었다. 효율성을 극대화한 시스템일수록 작은 충격에도 크게 흔들린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2021년 수에즈 운하를 막아선 컨테이너선 한 척이 글로벌 교역의 10% 이상을 멈춰 세운 사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호가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되며 항로를 가로막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핵심 물류 통로가 약 6일간 마비됐다. 선박 수백 척이 운하 양쪽에 발이 묶였고, 자동차·전자·에너지 등 주요 산업의 공급망에도 연쇄적인 지연이 발생했다. 지나치게 효율적으로 설계된 시스템은 오히려 ‘플랜 B’를 지워버렸다.
저자는 특히 199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들이 빠졌던 ‘지식 경제’의 함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이디어는 우리가 만들고, 생산은 다른 나라에 맡긴다”는 접근이 결국 제조 역량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산업 공유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을의 공동 목초지가 사라지면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하듯, 숙련된 공장과 공급업체가 해외로 떠나면 혁신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할 기반도 함께 사라진다. 한 번 잃은 제조 역량은 되찾기 어렵다. “공산품을 경쟁력 있게 생산하는 능력은 여전히 한 나라의 생활 수준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가까운 제조’다. 코로나19 시기 영국에서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산 수술 가운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의 한 의류 기업은 즉시 여성복 대신 의료용 가운을 생산해 지역 병원에 공급했다. 케임브리지의 엔지니어들은 3D 프린팅 기술로 단숨에 수천 개의 안면보호구를 만들어냈다. 생산과 소비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 즉 현지 제조 역량이 살아 있을 때 시스템은 더 유연하고 회복탄력적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제조업이 더 이상 지저분하고 낡은 산업이 아니라, 지구를 살리고 지역사회를 지키는 가장 혁신적인 무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복잡한 산업 구조를 생생한 사례로 풀어내면서도, 독자를 단순한 관찰자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소비자가 아니라 이 시스템의 일부다. 빠르고 싸게, 언제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선택이 어떤 구조를 만들어왔는지 돌아보게 한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