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서울 잠실의 롯데 애비뉴엘에 6층 아트홀에선 ‘뜻밖의 행사’가 열렸다. 명품 매장이 밀집한 백화점 내 문화 공간이라고 하면 흔히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오는 가운데 잘 차려 입은 ‘사모님’들이 우아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이 주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날 이 아트홀을 채운 건 빠른 비트의 전자음과 현란한 디제잉을 바탕으로 한 클럽 음악이다. 백화점식 밝은 샹들리에 조명 대신 길거리 어느 공연장처럼 조도를 은은하게 낮춘 공간 사이로 그래픽 영상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내부엔 스트리트 패션으로 중무장한 관람객들이 한 손에 위스키 잔을 들고 디제잉이 흘러나오면 춤을 추다가도 아트홀 곳곳에 걸린 각종 전시물을 감상하기 위해 멈춰 섰다. 전시물은 티셔츠, 운동화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다. 관람객들이 마치 예술품을 감상하듯 운동화나 티셔츠를 들여다보고 감상했다. 행사 주최 측이 일반 사물을 마치 예술 조형물처럼 전시해 놨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엔 20~30대 젊은 층부터 50~60대 중년 고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방문했는데, 패션 인플루언서부터 백화점 우수고객(VIP)까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한데 모였다.

이곳은 글로벌 패션 트렌드를 공유하는 미디어 플랫폼 ‘하입비스트(HYPEBEAST)’의 20주년 기념 전시 현장이다. 이 전시는 롯데백화점과 하입비스트가 공동 기획해 선보이는 글로벌 프로젝트다. 하입비스트는 2005년 캐나다에서 출범한 미디어 패션 잡지인데, 종이책이 아니라 SNS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패션·음악·예술 등 동시대 문화 전반을 아우르며 전 세계 디자이너와 패션 마니아들이 주목하는 트렌드 플랫폼이다. 1050만명의 SNS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팬덤 파워를 가졌다. 이번 행사는 전 세계 단 4개 도시에서만 진행되는 투어 전시로, 그중 서울이 포함됐다. 지난해 10월 뉴욕을 시작으로 도쿄와 홍콩을 거쳐 이어진 전시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개최지가 서울이다. 앞선 세 차례 전시에서만 수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유치할 정도로 흥행성이 있는 행사다.


하입비스트는 각 도시를 상징하는 전시 공간으로 가장 상업적인 공간인 백화점을 택했다. 앞서 도쿄와 홍콩에서는 각각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과 센트럴 랜드마크 쇼핑몰을, 서울에서는 ‘롯데타운 잠실’을 선정했다. 전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공간의 가장 정중앙에 위치한 조형물은 일반 면 티셔츠를 여러벌 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티셔츠가 걸린 형태와 각각의 티셔츠 위에 새겨진 로고와 그래픽이 합쳐져 마치 작품 같은 상품, 상품 같은 작품이 된다. 이처럼 행사장 내 모든 전시품들은 예술과 상업의 경계가 모호하다. 각각의 공산품이 어떤 공간에 어떤 형태로 놓여져 있느냐에 따라 예술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품을 감상한 후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다면 구매할 수 있다. 벽면엔 각 제품의 가격표가 마치 작품을 설명하는 네임택처럼 진열돼 있다. ‘슈프림’, ‘피스마이너스원’, ‘버질아블로 아카이브’ 등 하이엔드 스트리트 브랜드와의 콜라보 티셔츠를 국내 최초로 단독 발매해 판매한다. ‘온러닝’과의 협업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K패션 브랜드로 부상한 ‘포스트아카이브팩션(PAF)’의 티셔츠도 있다. 뉴욕, 도쿄, 홍콩에서 모두 하루 만에 완판을 기록했던 상품으로, 서울에서도 한정 수량으로 출시된 만큼 패션 마니아들의 오픈런 행렬이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단독 개최를 기념해 K아티스트와 협업한 특별 작품도 있다. ‘나이키 조던’, ‘케이스티파이’ 등 글로벌 브랜드와의 콜라보를 주로 하는 조형 예술가 ‘수린’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린은 주로 3D 프린트를 활용해 과거의 예술 조형물을 현대식 미디어아트로 제작하는 작가다. 이번 행사에선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는 여행’이라는 콘셉트 아래 하입비스트의 궤적이 롯데타운 잠실에 착륙한 모습을 우주선 형태의 조형물로 담아냈다. 수린 작가는 “상업적인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작가의 예술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각 조형물들을 감상한 후 전체 공간을 조망하니, 공간 전체가 하나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점을 깨우치게 된다. 입구부터 동선을 따라 걸어가면 패션 매거진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20년간 발자취를 시간 순으로 조명할 수 있다. 아날로그식 종이잡지에서 온라인 미디어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표현한 ‘아카이브’다. 패션 매거진의 궤적을 담고 있지만, 모든 사회문화의 시대적 흐름이기도 하다. 전시는 다음달 16일까지 열린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