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올해 오스카는 이 오래된 명제를 고스란히 증명했다. 전쟁과 갈등, 분열로 요동치는 ‘불안한 세계’를 은막에 옮긴 작품을 무대 중심에 세웠다. 동시에 ‘케이팝데몬헌터스’(이하 ‘케데헌’)에게 2관왕을 안기며 글로벌 주류 문화로 안착한 K콘텐츠의 위상을 선언했다. 영화 연출을 맡은 매기 강 감독은 “이 상을 한국인과 전 세계에 있는 한인들에게 바친다”며 수상을 자축했다.
‘케데헌’은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주제가상을 받았다. 한국계 제작진이 참여한 애니메이션과 한국 K팝 장르의 곡이 오스카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AMPAS)가 ‘와스프(WASP, 백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다소 보수적인 색채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이번 선택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구식’ 디즈니 대체한 새 문법
‘케데헌’의 수상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 지난해 6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 공개된 이후, 케데헌은 극장에서 '역개봉' 등 통상적인 영화 소비 패턴을 뒤집을 정도의 글로벌 신드롬을 낳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글로벌 누적 시청 5억 회를 넘겨 역대 넷플릭스 최고 흥행작에 이름을 올렸다. OST ‘골든’은 K팝 장르 첫 빌보드 싱글 차트 ‘핫100’ 1위를 차지했다. '골든'은 지난 1월 ‘오스카 전초전’으로 불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2관왕에 올랐으며, 미국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상인 ‘그래미 어워즈’에서도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할리우드 주류 제작 시스템과 전통적 영화 문법을 고수해 온 오스카가 트로피를 내준 것은 ‘케데헌’이 디즈니·픽사가 구축한 애니메이션 질서를 깨뜨렸다는 인식이 투영된 결과란 분석이다. 최근 다소 억지스러운 ‘PC(정치적 올바름)주의’ 메시지와 식상한 연출로 디즈니 신작들이 극장에서 부진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케데헌’이 새로운 서사 문법을 선보였다는 것. 특히 K팝 특유의 역동성과 동양 무속을 가미한 독특한 오컬트적 설정 등이 전 세계 젊은 세대 주파수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놓고 경쟁한 ‘주토피아2’도 결국 기존에 있던 스토리텔링의 재생산”이라며 “애니메이션은 ‘새로움’이 중요한데 ‘케데헌’은 소비층에 있어 너무나도 새로운 콘텐츠란 점에서 작품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강 감독은 이날 수상 소감에서 “‘저처럼 생긴 사람들’이 영화에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면서도 “이제 다음 세대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콧대 높은 배우도 ‘응원봉 떼창’
K팝이 소수가 즐기는 서브컬처가 아닌 글로벌 ‘코어 문화’라는 사실은 이날 시상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극중 걸그룹인 헌트릭스의 보컬을 맡은 이재, 오드리 누나, 레이 아미가 축하 무대로 ‘골든’을 부르자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에마 스톤,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응원봉을 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곡 중 후렴부 한글 가사인 ‘영원히 깨질 수 없는’ 부분에선 떼창이 울려퍼졌다. 무대에는 갓을 쓴 댄서, 전통 한복을 입은 댄서들까지 등장해 열기를 더했다.

오는 21일 방탄소년단(BTS) 광화문 공연에 앞선 K팝 공연이 오스카상 무대에서 펼쳐진 셈이다. 무대를 마친 후 ‘골든’은 유력한 후보 중 하나였던 영화 ‘씨너스: 죄인들’의 ‘I Lied To You’를 제치고 주제가상을 받았다. 노래를 부른 이재는 “어릴적 사람들은 내가 ‘K’를 좋아한다고 놀렸지만, 지금은 전 세계 모두가 한국어로 된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다”고 감격했다. 이에 대해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케데헌’은 일종의 경계인 집단이 만든 작품이라는 의미부여가 있다”고 짚었다.
다만 이날 오스카 측이 주제가상 수상소감을 강제 중단한 점은 ‘옥에 티’로 거론된다. 이재가 발언 후 마이크를 동료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소감을 마치는 분위기의 음악이 나왔고, 카메라도 다음 장면으로 전환됐다. 유독 이 수상 소감에서만 퇴장을 재촉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자 CNN은 “오스카는 K팝을 그런 식으로 무시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오스카 승자는 ‘원 배틀’
오스카하면 떠오르는 호명 문구 “And the Oscar goes to…(오스카의 영광은…)”와 함께 올해 가장 많이 호출된 이름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하 ‘원 배틀’)였다. 이 영화는 최고영예인 작품상과 각색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6관왕에 올랐다. 총 16개 부문에 올라 ‘타이타닉’의 14개 부문 후보 지명을 경신해 주목받았던 ‘씨너스: 죄인들’(이하 ‘씨너스’)은 각본상, 촬영상 등 4개 수상에 만족했다.

올해 오스카는 주요 부문에서 각축을 벌인 ‘원 배틀’과 ‘씨너스’를 내세워 통해 사회 갈등이 높아지는 미국의 위기와 불안한 국제 정세에 대한 우려를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토마스 핀천의 <바인랜드>를 원작으로 왕년의 혁명가가 딸을 납치한 적을 쫓는 액션 드라마인 ‘원 배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뱀파이어 호러 판타지인 ‘씨너스’ 모두 인종차별, 백인우월주의 같은 미국 사회 화두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이민자 단속 정책 등을 떠올리게 하는 시의성으로 주목받았던 이유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하는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 미국 사회의 느슨한 복지 안전망을 풍자한 ‘웨폰’이 각각 장편 다큐멘터리, 여우조연상 부문에서 수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감독상은 ‘원 배틀’을 연출한 폴 토마스 앤더슨이 받았다.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은 ‘씨너스’의 마이클 B. 조던, ‘햄넷’의 제시 버클리가 각각 받았다. 남우조연상과 여우조연상은 ‘원 배틀’의 숀 펜, ‘웨폰’의 에이미 매디건에게 돌아갔다.
유승목/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