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9월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 낯선 기업 한 곳이 이름을 알렸다.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에 본사를 둔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이 회사는 ‘중국은 절대 D램을 못 만들 것’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자체 설계·생산한 8기가비트(Gb)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D램을 공식 출시했다. 당시 한국 주력 D램과 5년의 기술 격차가 있는 제품이었지만, 중국산 칩 실물을 목격한 국내 반도체업계의 충격은 컸다. 6년이 지난 뒤 CXMT는 최근 미국의 반도체 규제를 정면 돌파하고 첨단 제품을 생산하며 중국 산업계엔 자부심을, 한국 기업엔 공포감을 주고 있다.
◇사명에 담긴 시진핑의 ‘반도체 굴기’
1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CXMT는 이르면 이달, 늦어도 올해 상반기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상장을 앞두고 공시한 증권신고서를 통해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CXMT의 주주 구성, 인력, 실적, 고객사, 연구개발(R&D) 투자비 등이 공개됐다.CXMT는 2016년 중국 반도체산업의 수도로 불리는 안후이성 허페이시에 설립됐다. 중국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 한자인 ‘창(長)’은 ‘길다’ ‘장기적이다’라는 뜻으로 지속적인 투자와 장기 성장을 의미한다. ‘신(?)’은 ‘금(金)’ 세 개가 겹친 글자로 막대한 자본, 재정 축적을 상징한다. 국가 중심의 장기적인 투자로 메모리 굴기를 실현하겠다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의지가 담긴 셈이다.
CXMT는 사명에 담긴 뜻처럼 설립 이후 10년간 시 주석이 주도하는 ‘반도체 굴기’의 선봉에 서서 성과를 냈다. 지난해 11월 최신 저전력 D램인 LPDDR5X를 깜짝 공개하며 글로벌업계에 충격을 준 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LPDDR5X는 갤럭시S 시리즈나 아이폰 같은 프리미엄 스마트폰에 적용되는 모바일 기기용 D램으로 전력 소모량이 적은 게 특징이다.
최근엔 인공지능(AI) 시대 전략 물자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HBM은 D램 8~12개를 벽돌처럼 쌓아 올려 용량과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한 AI 서버 맞춤형 D램이다. CXMT는 올해 D램 생산을 위한 웨이퍼의 20%를 HBM3(4세대 HBM) 제조에 투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HBM3는 최신 제품은 아니지만 지금도 중국 화웨이 어센드9 시리즈와 엔비디아의 H100 같은 AI 가속기에 들어간다. 한국 기업과의 HBM 기술 격차가 2~3년 수준으로 좁혀진 것이다. CXMT의 내년 목표는 현재 HBM 시장 주력 제품인 HBM3E(5세대)를 양산하는 것이다.

◇보조금 바탕으로 빅테크와 협업
CXMT는 증권신고서에 “핵심 제품·공정 기술은 선진 수준에 도달했다”고 적었다. 그간 반도체업계에선 ‘CXMT와 한국 기업과 기술 격차가 상당하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CXMT가 스스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겨룰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중국 기업 특유의 허풍으로만 볼 수 없다는 분석이 많다. 정부 지원금을 바탕으로 CXMT는 매년 조 단위 연구개발(R&D) 투자를 하고 있다. 2022~2024년 CXMT 합산 매출에서 연구개발비(152억위안·약 3조3000억원)가 차지하는 비중은 삼성전자(10.2%)의 세 배 이상인 36.6%다.
지난해 6월 말 기준 R&D 인력도 4653명으로 전체 임직원 1만5300명의 30.41%에 달한다. 삼성전자(약 30%)와 비슷한 수준으로 추산된다. 칭화대, 베이징이공대 등 명문대 출신 인재에 실리콘밸리에서 본국으로 들어온 S급 인재 등이 더해지며 시너지를 내는 것으로 평가된다. CXMT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이사회 사내이사인 차오칸위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설립 초기 독일 메모리 기업 키몬다의 특허 포트폴리오 인수는 CXMT 성장사(史)에 새겨진 결정적 장면으로 꼽힌다. CXMT는 키몬다(2009년 파산)의 D램 특허 포트폴리오를 대거 매입하고 엔지니어들을 데려와 성장 기반을 다졌다.
대규모 투자와 초고속 성장의 배경엔 중국 정부가 있다. 회사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주요 주주는 청후이지뎬(??集?·21.67%), 창신지청(長?集成·11.71%), 국가대기금 2기(8.73%), 허페이지신(合肥集?·8.37%), 안후이성투자(7.91%)다. 이들은 지방 정부와 국유 펀드의 합작사로 CXMT가 사실상 국유기업임을 나타낸다.
기술력을 갖춘 CXMT의 또 다른 무기는 ‘세계 최대 내수시장’이다.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샤오미, 레노버 등 ‘레드 테크’를 대표하는 중국 정보기술(IT) 기업이 CXMT의 D램을 매입하며 주요 고객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단순 고객사를 넘어 CXMT에 투자하고 제품을 공동 개발하며 자국 메모리 기업의 성장을 측면 지원한다.
◇이재용, “슈퍼호황에 中 살아난다” 경계
CXMT의 부상은 수치로 증명된다. CXMT는 지난해 3분기 옴디아 발표 기준 점유율 4.7%로 세계 4위에 올랐다. 올해는 점유율이 10%에 근접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상장은 CXMT 고속 성장의 방아쇠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 가치는 3000억위안(약 65조원) 수준, CXMT는 상장을 통해 295억위안을 조달할 계획이다. 이 자금은 베이징에 팹(공장) 2를 증설하고 지난해 착공한 상하이 신규 팹 및 패키징 시설에 투입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본격화한 메모리 반도체 슈퍼 호황으로 그간 CXMT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리던 ‘재무 리스크’도 해결되는 분위기다. CXMT는 2022년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누적 매출은 약 570억위안, 누적 순손실은 408억위안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 실적 추산치는 매출 550억~580억위안, 순이익 20억~35억위안으로 첫 흑자 전환을 공식화했다. AI발 메모리 가격 급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실적이다.
한국 기업의 경계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사장단 회의와 비공식 행사에서 연이어 “메모리 슈퍼 호황이 한국 기업에 좋은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며 “CXMT 등 중국 메모리 기업의 실적 개선이 본격화하면 삼성에 두려운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경주/황정수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