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3월 11일 오후 5시 6분국내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호황으로 쌓아둔 현금이 160조원을 돌파하면서 이 자금의 행방에 이목이 쏠린다. 전통적 곳간인 은행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 규제 등으로 대출 영업이 힘들어진 은행들이 예금 유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장에서는 수조원대 ‘반도체 머니’가 채권시장을 비롯한 자본시장으로 유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여윳돈 못 굴리는 ‘반도체 투톱’
1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합계액은 160조원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125조8471억원으로 전년 대비 11.7% 늘었고, SK하이닉스는 2024년 말 약 14조원에서 지난해 말 34조9423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올해 반도체 영업이익 전망치가 상향 조정되고 있어 이들의 현금 보유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가에선 삼성의 현금 보유액이 215조원, 2027년 말엔 278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과거 두 회사는 반도체를 팔아 벌어들인 달러 대부분을 해외 법인에 보관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원화 가치 안정을 위해 정부가 달러를 국내로 반입할 것을 요구하면서 국내에서 운용해야 할 자산이 늘고 있다.삼성전자는 주요 시중은행을 상대로 원화와 달러 자금을 가리지 않고 만기 2개월 이내의 단기 예금 상품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금리부 수시입출식 예금(MMDA), 단기 정기예금 등이 주요 대상이다. 현금을 오래 묶어두기보다 비교적 안전하게 굴리면서도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확정금리형 상품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은행들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 운용 부담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맡기려는 자금은 규모가 크고 만기가 짧아 사실상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단기성 자금에 가깝다. 은행으로선 안정적으로 굴릴 투자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수익을 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주요 은행은 삼성전자 자금을 적극적으로 받기보다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일부 수용하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가계대출이 각종 규제로 사실상 막혀 있어 예금을 받아도 이를 대출로 연결하기 어려워 자금 운용이 제한적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대형 우량 고객의 자금이란 점에서 반갑긴 하지만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마땅한 운용처를 찾기 쉽지 않다”며 “무작정 많이 받으면 은행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안정성·유동성 ‘두 토끼’ 노린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증권사 채권형 랩어카운트·특정금전신탁(랩·신탁)에 1조원을 투자했다. 당시 자금이 1년 만기 여신전문회사채(여전채)에 유입되면서 금리 안정 효과를 냈다. 삼성전자는 설비투자가 수시로 이뤄지는 데다 인수합병(M&A)에도 적극적이다. 작년 한 해 설비투자에만 52조7000억원을 썼다. 원금을 지키면서도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는 상품이 필요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AAA 등급’ 은행채 등 안정적 채권 상품에 분산 투자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4년 현금 보유액이 급증했을 당시 3000억원을 투자해 3년 만기 국고채와 5년 만기 국고채를 직접 사들였다. 이번에는 최근 채권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직접 투자보다 단기 금융상품 및 신탁 등을 통한 간접 투자를 타진하고 있다.시장에서는 반도체 기업들의 자금이 채권시장으로 본격 유입될 경우 시장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채권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들은 향후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를 위해 현금을 쥐고 있어야 하는 ‘대기 자금’ 성격이 강하다”며 “안전 자산인 국공채나 우량 금융채 위주로 자금이 투자되면 단기 금리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철/김진성/김채연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