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이란 전쟁 장기화로 반도체 업황이 '다운 사이클'(침체기)에 진입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메모리 수요가 급감했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모습이 재연되지는 않을 것이란 증권가 분석이 나왔다.
김연준·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보고서를 통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가능성으로 유가가 급등하자 반도체 산업이 다운턴에 진입했던 2022년 러·우 전쟁 발발 이후 상황과 유사한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는 시각이 확산하고 있다"며 "하지만 당시와 같은 다운턴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2022년 당시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원격교육 등에 힘입어 과도하게 증가했던 소비자용 정보기술(IT) 수요가 러·우 전쟁 이후 급격히 되돌려지는 반작용이 나타났다"며 "같은 해 4월 중국의 상하이 봉쇄로 글로벌 IT 공급망과 수요에 동시 충격이 가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2021년 IT 하드웨어 호황을 기반으로 계획됐던 메모리 반도체 증설이 2022년 진행되면서 공급은 빠르게 늘었으나 수요 둔화에 대응한 감산은 같은 해 3분기 이후에 시작됐다"며 "재고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메모리 산업은 인공지능(AI) 등장 이전까지 뚜렷한 수요처를 찾지 못해 장기간 다운턴에 진입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현재는 생산능력(CAPA)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 속 AI 추론에 따른 메모리 수요가 먼저 증가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김 연구원은 짚었다. 그는 "수요 성격도 PC·모바일과 같은 소비자용 IT 하드웨어가 아닌 AI 인프라라는 점이 다르다"며 "이란 전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가 러·우 전쟁 당시보다 영향이 클 수 있으나, 현재 반도체 수요 구조와 공급 환경이 모두 다르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와 같은 메모리 다운 사이클 재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다만 고유가 장기화로 데이터센터 투자 수요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은 경계 요인이라고 김 연구원은 진단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확대되면서 금리 인하 지연 혹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러한 금융 환경 변화는 데이터센터 투자를 둔화하고, 결과적으로 반도체 수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유가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를 가정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해당한다"며 "현재로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실제 에너지 가격과 글로벌 IT 투자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판단하기 이르고, 아직 반도체 수요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고정삼 한경닷컴 기자 js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