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환율과 고금리에 짓눌린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미·이란 전쟁 여파로 유가까지 뜀박질하자 존폐 위기에 몰렸다. 고유가, 고환율에 취약한 플라스틱 관련 석유화학 업체가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용 부담에 전자·자동차 부품 업계, 건축자재 업계 등으로 충격이 확산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김희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중동 사태가 장기화하면 중소기업의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환율 탓에 물류·원료비 올라도 상승분 그대로 떠안아 '속앓이'
"수입 비중 높으면 유동성 위기"
원유에서 추출한 폴리카보네이트로 투명한 채광창 등 건축 내·외장재를 제조하는 N사는 유례없는 겹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수년째 이어진 건설경기 침체로 판로가 거의 끊긴 데다 중동 사태로 원자재 가격마저 오르면서다. 고환율 여파로 작년 11월 이후 폴리카보네이트 가격은 ㎏당 50~100원 상승해 ㎏당 2500~2600원까지 치솟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터져 N사는 LG화학 등으로부터 다음달엔 ㎏당 100원을 더 인상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원료비와 물류비가 연일 오르는데 이런 원가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면 물건이 팔리지 않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수입 비중 높으면 유동성 위기"
◇“제품 단가 올리면 거래 끊겨”
장기간 고환율과 고금리에 시달린 중소기업계는 미국·이란 전쟁이라는 복병을 만나 사면초가에 내몰리고 있다. 중소기업계는 원료비와 물류비가 올라도 대기업 납품 단가에 반영하기 어려워 피해가 더 크다.스티로폼 제조사 D사 관계자는 “각종 포장재와 완충재로 쓰이는 스티로폼을 가전제품 회사, 대형 물류회사 등에 납품하고 있는데 원료 가격이 올라도 제품 단가에 반영했다간 거래가 끊길 것”이라고 털어놨다.
벤젠·프로필렌으로 에폭시 수지를 생산하는 K화학 관계자는 “환율 상승에 따른 원가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급사와 단가를 놓고 협상 중이지만 타협점을 찾기 쉽지 않다”며 “재고가 2개월 치뿐이라 타결이 안 되면 생산까지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3高 지속되면 中企 유동성 위기
수입 원자재를 쓰는 중소기업은 고환율을 가장 큰 부담으로 거론했다. 대부분 영업이익률이 3% 미만인 중소기업은 환율이 예상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도 적자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생활가전제품을 생산하는 I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달러당 1400원을 예상하고 사업 계획을 짰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며 “올해는 대내외 위기를 고려해 1500원을 가정했지만 이란 전쟁 때문에 경영 계획을 전면 바꿔야 할 것 같다”고 걱정했다.정부 관계자는 “현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란 전쟁에 따른 해상과 항공 물류 차질”이라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중장기적으로 고유가와 고환율이 누적되면 수입 비중이 높은 내수 기업의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원자재와 물류비 인상에 따라 영세 소상공인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고유가가 지속되면 택배비와 화물차 비용도 올려달라는 요구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관계자는 “원자재 비용과 물류비 상승으로 제조업체 공급 원가가 뛰면 유통사도 그 비용을 제품값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대출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엔 시장금리 상승세도 큰 부담이다. 지난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 비율은 역대 최고인 17.1%에 달했다. 업황 부진에 시달리는 석유화학, 철강업계 중소·중견기업이 특히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전해졌다.
◇호르무즈 봉쇄…수출 기업 ‘발 동동’
최근 중동 수출이 활발하던 K뷰티 업계에도 전쟁의 불똥이 튀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된 데다 이란의 미사일 폭격 여파로 중동 국가의 은행, 관공서 운영이 마비돼 업무 협의는 물론 송금까지 막히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카타르에서 피부 보습제 수출 인증을 받아 수출 일정을 조율하던 한 화장품 기업도 전쟁 여파로 제품 생산을 중단했다. 다른 K뷰티 회사 관계자는 “두바이에 물건을 보냈는데 현지 은행 업무가 차질을 빚어 물품 대금을 수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중동에서 산업용 가스를 수입하는 P사도 원료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당장은 재고가 있어 버티지만 전쟁이 조속히 끝나지 않으면 이달 말부터 수급난이 닥쳐 어려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정선 중기선임기자/박진우/황정환/라현진 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