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장아장 걷는 악어, 뱀을 목도리처럼 두른 늑대, 따사로운 햇살 아래를 걷는 까마귀….
노랑·빨강·초록·파랑 원색으로 그린 그림들은 마치 아이가 그린 듯 조금 서툴러 보인다. “이건 나도 그리겠다”는 말을 하는 관객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작가인 앤디 피셔(39)에게 대놓고 물었다. 애들 그림이랑 뭐가 다르냐고. 그러자 피셔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이 그림은 39살이 그렸다는 게 차이랄까요. 아이들은 언제 그림을 시작하고, 언제 멈춰야 할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요. 그래서 그 말은 제게 칭찬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건 아셔야 합니다. 더 복잡한 테크닉으로 그린 그림이 반드시 더 좋은 그림인 건 아니에요.”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에는 피셔의 신작 19점이 나와 있다. 독일 뉘른베르크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피셔의 원래 직업은 자동차 정비공이었다.
“스케이트보드를 즐겨 탔는데, 보드 밑면에 새겨진 그래픽을 보며 ‘이것도 예술 아닐까’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다 미술관에서 현대 추상미술을 처음으로 접하고 ‘예술이 꼭 사진처럼 정확할 필요는 없구나, 예술은 자유로운 거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정비공을 그만둔 그는 서핑 강습, 스케이트보드 레슨, 슈퍼마켓 판매 등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며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 계산을 해보니 1년은 버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최악의 경우엔 정비공으로 돌아가면 되니,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그는 독일 명문 베를린 예술대학교에 원서를 냈고, 지금의 화풍과 비슷한 작품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해 합격했다. 졸업 후에는 ‘토이 베를린 마스터즈 어워드’를 수상하면서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뒤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올해는 독일 만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권위 있는 독일 미술관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작가가 개인전을 여는 건 이례적인 성취다.
미술계에서는 보통 피셔 그림과 같은 화풍을 ‘아르 브뤼(Art Brut)’라고 부른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날것 그대로의 예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피셔는 명문 미대를 졸업한 작가지만 오일 스틱과 연필을 사용해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전시 제목 ‘Feil Good’의 ‘Feil’은 ‘Fail’(실패)를 일부러 틀리게 쓴 것이다. 그는 “살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림에는 악어·뱀·까마귀·호랑이·늑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16~17세기 유럽 회화에 종종 등장하는 동물 중 좋아하는 동물로 골랐다. 의외로 배경의 흰색은 신경써서 칠한다. 밑칠에만 3~4일이 걸린다. 덕분에 작품에서는 흰 배경이 두드러진다. 여백의 미(美)를 강조하는 동양화와 달리 여백을 미완성으로 간주해온 서양화 전통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피셔는 “내 그림의 여백은 긴장감을 담고 있다”며 “뭔가를 더 그려야 한다는 긴장을 견디고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신경을 쓴다”고 했다. 그 말대로 그의 작품에는 절제된 터치와 구성이 녹아 있어서, 보다 보면 ‘이렇게 그리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지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에게 예술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자유입니다. 제 작품도 마찬가지로,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보는 사람의 자유에요. 바라는 건 하나, 미소를 지으면서 봐주세요.” 전시는 4월 1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