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닝은 결국 자신과의 약속이다. 대부분 혼자 달리는 운동이지만,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 비슷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같은 길을 달리게 된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워질수록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함께 단단해진다. 살아있다는 생동감과 목표를 이뤘다는 뿌듯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가끔 기분이 내키면 2~3km를 달려본 경험이 전부인 기자는 인생 처음 마라톤 대회에 참가, 5km 코스에 도전했다. 완주할 수 있을까? 다 뛰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증 속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5km를 쉬지 않고 달린 것만으로도 막연히 선을 그어 두었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기분이 들었다. 기자의 기록은 5.78km, 35분 29초.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묘하게 잔잔한 여운이 남았다. 마치 올해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바다를 품에 안고,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2026 사이판 마라톤’
북마리아나 제도를 대표하는 스포츠 이벤트 ‘2026 사이판 마라톤’이 3월 7일 토요일 사이판에서 열렸다. 올해 18회를 맞이한 대회에는 총 15개국에서 772명이 참가했으며, 이 중 한국인 참가자는 286명으로 전체의 37%를 차지했다.
대회의 시작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4시 풀 마라톤이 열었다. 매년 3월 사이판에서 개최되는 대회는 마리아나 관광청(Mariana Visitors Authority)과 북마리아나 육상연맹이 주최·주관하며, 남태평양의 자연 속을 달리기 위해 전 세계 러너들이 모여드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다.

사이판 마라톤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코스다. 빌딩 숲을 달리는 도심 마라톤과 달리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 위에서 대회가 펼쳐진다. 바다와 비치, 야자수가 이어지는 풍경 속에서 러너들은 남태평양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달린다.

2026년 대회는 풀 마라톤, 하프 마라톤, 10km, 5km 종목으로 진행됐다. 대회 당일은 비와 바람이 섞인 궂은 날씨였지만, 오히려 추억을 짙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젖은 도로 위를 달리는 러너들, 곳곳에서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지역 주민들의 따뜻한 환대는 사이판 마라톤을 스포츠 이상의 경험으로 완성한다.
한국 러너들의 활약
2026 사이판 마라톤에서는 한국 러너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여러 종목에서 상위권 기록이 이어지며 존재감을 보여줬다. 남자 10km 부문에서는 안은태가 34분 56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안영환이 37분 45초로 3위에 올랐다. 여자 10km에서는 한국 러너들의 강세가 특히 두드러졌다. 이윤지(44분 12초), 박민경(47분 23초), 백기윤(50분 30초)이 각각 1·2·3위를 차지하며 시상대를 모두 한국 러너들이 채웠다.

하프 마라톤에서도 한국 러너의 이름이 이어졌다. 여자 하프에서는 릴리 물든이 1시간 34분 39초로 1위, 김보은이 1시간 47분 17초로 2위, 크리스티 브라이슨이 1시간 49분 03초로 3위를 기록했다. 남자 하프에서는 쇼헤이 미야모토가 1시간 19분 14초로 우승, 주디 설리반이 1시간 29분 38초로 2위, 김동환이 1시간 34분 36초로 3위에 올랐다.

풀 마라톤에서는 일본 러너들의 선전이 돋보였다. 남자 풀 마라톤에서는 히로키 나카지마가 2시간 45분 53초로 우승, 이어 히로키 카이(2시간 55분 07초), 김태권(2시간 59분 31초)이 뒤를 이었다. 여자 풀 마라톤에서는 토모미 나카지마가 3시간 17분 16초로 1위, 이시카와 에마리가 3시간 49분 27초로 2위, 한국의 정예지 러너가 3시간 50분 38초로 3위를 기록하며 시상대에 올랐다.
첫 국제 마라톤에서 성적 거둔, 정예지 러너의 특별한 순간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이번 대회에서 정예지 선수의 기록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첫 국제 마라톤에 참가해 당당히 시상대에 오른 것이다. 러닝 크루 ‘러너블(Runable)’에서 참가한 정예지 선수의 수상 소감을 들었다.

“평소 러닝은 꾸준히 했지만, 정식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운이 좋게 기록을 세웠고 기분이 좋습니다. 비가 오다 말다하는 날씨였지만, 바다와 비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고, 코스 곳곳에서 응원해주신 분들의 따뜻한 환대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내년에도 다시 참가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왜 달릴까? 오랜 러닝으로 그을린 피부, 아담하지만 단단하고 강인한 체구의 정예지 선수를 보며, 러닝이 한국에서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마라톤은 기록의 스포츠이면서 동시에 경험의 스포츠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 그 다음은 또 어디까지 갈까?’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다음 도전을 꿈꾼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누군가는 삶의 변화를 위해, 또 누군가는 여행을 위해, 사이판에 모인 모든 러너가 각자의 결승선에서 숨이 가쁜 얼굴로 웃음 짓고 있다. 남태평양의 바람을 가르며 달렸던 2026 사이판 마라톤은 기자에게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추억으로 남았다.
정상미 기자 vivi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