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가 껍데기 같았거든요. 만나면 시답지 않은 말들만 하고요. 그런데 알맹이를 얻은 것 같습니다. 너무 감동이에요.”홋카이도 예술 여행을 다녀왔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그 자체로도 예술이지만, 인간은 눈밭에 홀로 선 나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처음에 우리는 예의 있는 미소를 띠며 이만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잠깐의 동행일 뿐 우린 낯선 타인들이잖아요’라며 경계하면서. 그런데 여행 마지막 날, 이번 팀의 유일한 청년이 저리 말한 것이다. 인생의 알맹이를 얻어간다고.
여행은 내 품을 키운다. 상황에 담대해지고 관계에 유연해지고. 그러고 보니 여행과 미술관은 무척 닮았다. 낯선 경험 속에 스스로를 놓아주고,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고, 마음 깊은 곳을 길어 올려 가만히 꺼내 보게도 한다.
눈이 쏟아지는 길을 달려 오비히로시립미술관에 갔다. 보고 싶던 밀레의 그림들을 만났다. 이 전시는 미술관이 밀레 작품을 소장한 것을 기념하는 전시다. 소도시 미술관인데도 예술 작품 구입 예산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진 미술관은 고요했고 평화로웠다.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온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그림 속을 천천히 거닐었다. 바르비종 화가들의 자연에 대한 경외에 깊이 공감하며.
그림의 모든 순간이 기도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과 그의 양들도, 호숫가에서 달게 물을 마시는 소들도, 무리를 돌보는 사슴도, 가만히 바느질하는 여인도. 단지 평화로운 일상을 그린 게 아니라 그러려고 안간힘을 쓰는 삶의 기도 같았다. 우리는 각자 고른 그림 앞에 오래 머물며 글을 썼다.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뭉클했다. 낭만과 공포, 평화와 불안, 삶과 죽음이 동행하는 게 우리 삶이다. 늘 행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안할 것도 없다. 그저 삶의 모순과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면 되겠다.
이번 여행에서 ‘결정적 순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나만의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해보자고. 밀레가 있는 미술관에 설국의 근사한 풍경, 바닷가를 끼고 달리는 해안 열차와 오호츠크해를 가로지르는 쇄빙선까지. 너무 멋진 경험을 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고른 결정적 순간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근사한 장면이 아니었다. 어쩌면 구도도 어정쩡하거나 얼핏 보면 이게 뭐지 싶은 순간. 신기하게도 모든 순간에 사람, 우리가 들어 있었고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전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모두 주인공으로 살면 좋겠지만, 우린 자주 조연이고 종종 엑스트라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진심을 말할 수 없을 때도 많다. 눈빛은 흐려지고 입을 앙다물기도 한다. 조금 슬픈 표정을 하고 있을라치면 누군가 말한다. 사는 일 다 쓸쓸한 거라고, 어쩔 수 없다고.
아니다. 다 그런 거라고 심드렁하긴 싫다. 화려한 무대는 아니어도 각자의 삶은 유일한 인생 독무대. 여행에서 돌아오며 우리는 모두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사회에서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하고,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도 스르륵 하고, 그야말로 너무 따뜻한 한 팀이 됐다. 최고의 여행은 사람으로의 여행이란 말, 완벽하게 동의한다.
껍데기 같은 세상이지만 생의 알맹이는 도처에 있다. 다만 그것을 꺼낼 계기가 별로 없는 것뿐. 미술관도 일상을 벗어난 잠시의 여행과 같다. 나의 알맹이를 찾고 싶다면 한나절의 미술관 그리고 나에게로의 여행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