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만에 ‘천만 영화’ 탄생 목전
3일 영화진흥위원회 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달 5일 개봉한 ‘왕사남’은 전날까지 921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 중이다. 연휴였던 지난 1일에만 81만여 명이 관람해 개봉 이후 일 최다 관객을 기록하는 등 개봉 4주차에도 흥행 뒷심을 보여주고 있다. 사극 첫 천만 영화로 38일 만에 900만 명을 모은 ‘왕의 남자’보다 흥행 페이스가 빠르다. 극장가에선 이번 주 내 10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이 경우 ‘왕사남’은 한국 영화시장에서 외화 포함 역대 34번째, 한국 영화로만 좁히면 25번째 천만 영화가 된다. 특히 ‘범죄도시4’ 이후 2년 만에 나오는 천만 영화란 점에서 영화계가 반색하고 있다. 2012년 이후(팬데믹 시기 제외) 매년 배출하던 천만영화 계보가 지난해 끊겼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 영화 중 가장 흥행한 ‘좀비딸’마저 관객 수가 564만 명에 그치면서 영화 제작시장 투자심리가 경색된 상황이다.
◇팩션에 신파 더한 ‘아는 맛’
‘왕사남’ 흥행의 일차 동력은 한국 관객이 선호하는 ‘아는 맛’의 변주에서 나온다. 영화의 얼개 자체는 단순하다. 세조실록에 쓰인 1457년 7월(음력 세조 3년 6월) 기사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니…’와 11월 기사(음력 10월)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는 기록 사이의 여백을 파고드는 팩션이다. 실록의 빈틈을 영월 지역 야사와 후대 문헌의 내용으로 메우는 기발한 설정에 한국적 신파를 녹여내 세대를 아우르는 ‘단종앓이’를 선사했다.김동원 영화진흥위원은 “역사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자산으로 영화화하면 관객 접점을 넓힐 수 있다”고 말했다.
민초의 시선으로 역사를 비틀어보는 전개는 검증된 흥행 공식이다. 앞서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광대 공길(이준기)을 통해 금단의 비극을 노래하고,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광해군일기 속 며칠의 공백을 ‘가짜 왕’ 하선의 입을 빌리는 방식으로 풀어내 천만 영화에 올랐다. 도덕적 대의에 갇히는 대신 생존과 실리를 우선하는 보통 사람의 행동, 욕망으로 가득 찬 악동을 그린 피카레스크적 로망이 대중적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왕사남’의 엄흥도 역시 ‘이밥에 고깃국’을 먹기 위해 유배 당한 왕의 처지를 이용하려는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 웃음을 자아냈다.
◇경쟁작 부재 ‘대진운’도 한 몫
외부적 요인도 완벽했다는 게 ‘왕사남’ 흥행을 바라보는 업계의 진단이다.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를 제외하면 별다른 경쟁작 없이 한 달 가까이 스크린 독식에 가까운 환경을 누렸다는 것이다.특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 영화로 입소문을 타며 설 명절과 3·1절 연휴 영화관람 수요를 고스란히 흡수한 영향이 컸다. 실제로 ‘왕사남’은 지난달 28일부터 나흘 간의 3·1절 연휴에만 247만 명이 관람했다. 지난 2일 기준 ‘휴민트’(754개·1622회 상영)의 세 배에 달하는 2150개의 스크린을 확보해 9322회를 상영하는 등 상영 기회를 몰아받은 결과다.
‘왕사남’의 예기치 않은 흥행이 영화산업 불황을 타개할 모멘텀이 될 지는 미지수다. 산만한 연출과 철저하지 못한 고증, 진부한 대사 등 만듦새에 대한 적잖은 비판 속에서 나온 상업적 성공이란 점에서다. 실험적인 각본 등에 대한 도전적 투자보다 검증된 공식에 투자가 쏠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천만 아니면 쪽박인 양극화 구조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