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볼 수 있나요?"
넷플릭스 화제작 '레이디 두아'에서 주인공 '사라 킴(신혜선 분)'의 대사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묻습니다. 그녀는 거짓 신분으로 가짜 명품 브랜드를 세워 사람들의 허울뿐인 안목과 허영을 드러내요. 이 드라마뿐인가요. <몬테크리스토 백작>, <위대한 개츠비>, <레 미제라블>…. 가짜 신분을 뒤집어쓴 주인공이 도리어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사랑받아 왔어요.
1881년 출간된 마크 트웨인의 고전 소설 <왕자와 거지>는 신분을 맞바꾼 두 인물을 통해 진실한 삶을 성찰하는 대표적 작품입니다. "고전이란 누구나 칭찬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트웨인이 남긴 '고전에 대한 오랜 농담'과 달리, <왕자와 거지>는 누구나 어려서 동화로 한 번쯤 접해봤을 고전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어른이 돼서 읽으면 사뭇 낯선 풍자극입니다.
"약자로 살아본 적 있소?"
소설은 16세기 중반 런던, 두 사내아이가 같은 날 태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부유한 튜더 가문에서 온 영국의 환영을 받으며 태어난 아기와 가난한 캔티 집안에서 '골칫거리'로 태어난 아기. '왕자' 에드워드 튜더 왕세자, 그리고 '거지' 톰 캔티입니다.
거지는 왕자를 꿈꾸고, 왕자는 거지를 꿈꿉니다. 동경하며 닮아가요. 캔티는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고 왕궁 생활을 상상하다가 왕자처럼 점잖은 말투와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에드워드는 캔티처럼 템즈강에서 헤엄칠 수 있다면 "아버지의 왕국을 내줘도 아깝지 않겠다"고 해요.
우연히 궁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누더기 옷과 공단 옷을 바꿔 입기로 해요. 잠시만 서로의 처지를 누려보려는 거였죠. 누더기 옷을 걸친 에드워드는 언제든 자기를 왕자로 봐줄 거란 순진한 오만에 휩싸인 채 병사를 혼내러 갔다가 뺨을 맞고 조롱 당해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느라 길을 잃고, 캔티의 아버지에 의해 집으로 끌려 갑니다.
신분이 뒤바뀐 상황에서 왕자는 왕이 됩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어 왕위를 물려받아요.
가짜 왕은 진짜보다 훌륭해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왕이란 이상적이기까지 해요. 왕좌에 앉은 캔티는 억울한 죄인을 풀어주고 부당한 법을 뜯어고쳐요.
진짜 삶은 가짜 신분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난생 처음 궁을 벗어난 에드워드는 세상을 배웁니다. 캔티의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기를 반복하며 부랑자들과 뒤섞이고 심지어 살인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하죠. 그러는 사이에 궁 밖 가난의 혹독함, 귀족들의 비정함을 알게 됩니다. 헛간에 숨어 송아지의 체온에 몸을 녹일 때에는 왕궁의 푹신한 침대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껴요. 강풍으로 낡은 헛간이 흔들리는 소리는 음악처럼 들릴 지경이에요. "한마디로 그는 행복했다."
두 사람은 가짜 왕의 즉위식 행차길에 극적으로 만나 오해를 벗습니다. 동화의 결말과 달리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에드워드는 왕이 된 이후에도 자주 일꾼들에 뒤섞여 대성당 무덤에 숨어있곤 합니다. 누추한 신세, 백성에 대한 연민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죠. 지난 소동은 의도치 않은 리더십 훈련이었던 걸까요. 왕은 캔티로 지내던 시절 억울한 사연을 들었던 인물들의 고충을 훗날 차례로 해결해줍니다.
약자로 살아보는 것만큼 약자를 더 잘 이해할 방법은 없죠. 왕은 종종 자신의 뜻에 반하는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고통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은 아시오? 짐도 백성도 알고 있지만, 경은 잘 모를 것이오."
계급의 허위 꼬집어
이 작품은 트웨인이 딸에게 헌정한 소설이에요. 그의 전작 <톰 소여의 모험>처럼 어린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아동 소설입니다. 하지만 잘 쓰인 역사소설, 풍자소설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왕자의 모델이 된 건 16세기 튜더 왕조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입니다. 나이를 좀 바꾸긴 했지만 실명을 그대로 가져다 썼죠. "내 누이 엘리자베스는 열네 살이고, 사촌 누이인 제인 그레이는 나와 동갑인데 우아한 데다 기품이 있지. 하지만 늘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또 다른 누이 메리는……." 에드워드의 대사가 일컫는 누이 메리는 메리 1세 여왕,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고요.
트웨인은 작품 곳곳에서 사회가 빈곤 문제에 얼마나 무심한지 질책해요. 헨리 8세 시절 영국에서는 허가증 없이는 구걸도 못했죠. 소설 속에서 한 남자는 말합니다. "영국에서는 배고픈 것도 죄가 되거든." 그의 아내는 '불법 구걸'을 했다는 죄목으로 매맞아 죽고, 아이들은 그 사이에 굶어죽었습니다. 남자는 외칩니다. "자, 자비로운 영국 법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축배를 드세!"
주제 자체가 사회 비판적이에요. 소설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이나 빈민굴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옷차림만 바꾸면 분별할 수 없다는 내용이죠. 한 마디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겁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자리더라도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적응해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분 제도란 부질 없는 광대극 같은 것이죠. 트웨인은 이후 흑인 노예와 백인 노예주의 갓난아기가 뒤바뀌는 이야기 <바보 윌슨의 비극>을 통해 인종 차별 문제를 직격하기도 했어요.
또 왕실과 종교의 갈등을 내비치며 종교가 또 다른 권력이라는 점을 꼬집어요. 사소한 절도에도 사형을 선고하는 불공정한 법 체계 등을 비판합니다.
명언 제조기 '美 문학의 아버지'
'영국 문학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라면 트웨인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이전까지 미국 작가들은 영국 문학의 고전적인 문체를 흉내냈는데, 트웨인은 미국 민중의 거친 입담, 사투리 등을 문학에 녹여내며 미국 소설의 문체를 발명했어요.
트웨인은 두 차례 영국 여행을 하며 이 소설을 썼습니다. 영국의 실제 장소가 곳곳에 등장해 마치 독자도 영국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요. 예컨대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친 건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영국 의회의 본거지로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산입니다. 에드워드의 대관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왕실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역사적 공간입니다. 2023년 찰스 3세의 대관식이 열리기도 했고요.
트웨인은 여행기도 다수 썼어요. 명언이 많기로 유명한 그는 <적도를 따라서>를 통해 이런 명언 역시 남겼습니다.
"진실은 허구보다 더 낯설다. 왜냐하면 허구는 가능성에 매달려야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