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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왜 고양이 발로 오는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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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왜 고양이 발로 오는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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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칼 샌드버그

    안개는 고양이 발로
    가만히 다가와


    조용히
    움츠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굽어보다가
    그러곤 일어나 가네.

    --------------------

    칼 샌드버그는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시인입니다. 시카고를 사랑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첫 시집 <시카고 시편>에 실렸습니다. 그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 기자로 일하면서 쓴 작품이지요.


    어느 날 그가 판사를 인터뷰하러 법원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랜트파크를 가로질러 가던 중 시카고 항구 위로 스며드는 안개를 봤습니다. 그리고 판사를 기다리는 동안 종이 조각에 이 시를 적었습니다.

    이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시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기자의 현장 감각, 도시 풍경, 하이쿠적 압축미가 어우러진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짧고 압축적이며, 한 장면에 집중하고, 설명 대신 이미지로 끝내는 게 이 시의 매력이지요.



    시는 때로 번개처럼 오지만 많은 경우 기다리는 시간에 찾아옵니다. 누구를 만나기 전의 10분, 일이 끝나고 돌아서는 5분, 막차를 기다리는 플랫폼 위의 몇 분, 병원 복도의 침묵 속에서도 옵니다. 그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느냐보다 얼마나 또렷하게 봤느냐가 중요하지요.

    샌드버그는 안개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고양이 발로’ 왔다고 썼습니다. 그에게 안개는 기상 현상이 아니라 소리 없이 다가와 잠시 웅크린 채 항구와 도시를 굽어보다가 말없이 떠나는 존재입니다. 이 한 번의 비유가 시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지요.


    그래서 ‘항구와 도시를 굽어보다가’라는 대목이 더 생명력을 얻습니다. 시인은 안개가 도시를 덮는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개가 도시를 내려다본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시선의 방향 덕분에 안개는 배경이 아니라 관찰자로 변합니다.

    도시는 인간이 만든 문명의 중심이지만 이 시에서는 잠시 안개의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항구와 도시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소음으로 가득한 공간이 안개 앞에서는 한 마리 고양이의 침묵 아래 놓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샌드버그는 시카고 시인으로서 철도, 공장, 노동, 거리의 숨결을 시에 담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개’에는 문명과 자연이 맞닿는 경계의 감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밀려온 안개가 도시의 어깨에 기대앉아 잠시 내려다보는 풍경을 짧은 순간에 포착한 것이지요.

    이 시는 짧지만 겸손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붙들고 사는 것들이 안개 앞에서는 얼마나 쉽게 흐려지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냉소적이지 않습니다. 설명 대신 장면을 놓아두고 독자가 스스로 마음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게 하지요.



    짧은 시 긴 여운! 좋은 시는 대상을 크게 만들지 않고 보는 사람의 감각을 크게 키웁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우리 마음의 각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시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

    창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도 큽니다. 많은 이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더 많은 시간, 더 넓은 책상, 더 완벽한 고요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샌드버그의 ‘안개’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 네 앞에 있는 한 장면을 제대로 보라. 거창한 주제나 세상을 뒤흔들 통찰이 아니어도 좋다.” 안개가 오는 발걸음을 볼 수 있다면 이미 절반은 이뤄진 것입니다.

    삶은 크지 않은 것들이 조용히 와서 조용히 지나가는 사이에 이뤄집니다. 마음의 변화도 그렇지요. 슬픔과 위로 또한 그렇게 옵니다.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기보다 어느 날 문턱에 와 앉아 있다가 잠시 우리를 내려다보고 또 떠납니다. 그때 그 발걸음을 알아보는 사람이 시인이고, 그 발걸음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게 시입니다.

    제 주변에도 고양이 발로 오는 것이 많습니다. 말없이 다가오는 생각, 이유 없이 젖어 드는 마음, 문득 떠오르는 얼굴, 한 줄의 문장, 한 사람의 친절…. 이런 것은 대부분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옵니다. 샌드버그의 시를 읽는다는 게 그 조용한 도착을 알아차릴 준비를 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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