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중심은 윌보다는, 윌의 아내 아녜스(제시 버클리)이다. 이 영화는 아이들을 지켜내려는 한 여자의 눈물겨운 모성의 이야기이며 그 같은 힘이야말로 세상을 지켜내거나 혹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라는 예술이, 전체에서 개인의 문제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치·경제적 문제에서 인간주의와 인문주의로 환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그널같은 작품이다. (실제로 감독인 클로이 자오 역시 <이터널스>라는 ‘멍청한’ CG 블록버스터에서 자신의 전작인 <노매드랜드>처럼, 스토리가 기반이 되는 작품으로 돌아갔다) 세상이 극단적으로 왜곡되고 변질할 때 그것을 되돌리는 방법은 영화 속 아녜스처럼 인간이 인간인 이유, 혹은 인간이 인간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인간 세상의 고통과 비극은 예술을 통해 치료되고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이 지닌 보편성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실감케 한다. 이 영화에 찬사가 이어지는 이유이다.

윌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눈으로 볼 때 집안일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라틴어 선생, 혹은 작가 지망생일 뿐이다. 윌이 한눈에 빠지게 되는 아녜스 역시 동네에서 ‘숲속의 마녀’로 불릴 만큼 특이한 행태를 보이는 여자이다. 아녜스는 죽은 엄마처럼, 그 엄마의 엄마처럼, 앞날을 내다보거나 최소한 육감 같은 것이 남다르다. 아녜스는 윌의 미래를 알아본다. 그녀는 그를 겨우 두 번째 만났을 때, 자신에게 얘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 윌은, 마치 자신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듯,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에 대해 말한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고 그녀를 데리고 이승의 문턱까지 왔지만,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경고에도 그 걱정과 유혹을 이기지 못해 아내를 다시 잃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윌과 아녜스가 마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비극을 겪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극 후반에 윌도 오르페우스처럼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윌이 돌아보는 것 때문에 에우리디케, 곧 아녜스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녜스가 무대에서 퇴장하려는 윌에게 자신을 향해 돌아보라고 소리친다. “나를 (돌아) 봐!” 윌은 오르페우스와 달리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을 해낸다. 그것으로 둘의 비극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윌과 아녜스는 결국 신화(예술, 스토리)를 넘어서 아들 햄넷을 잃은 고통을 이겨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녜스는 세 아이를 낳는다. 첫 딸 수재나(보디 레이 브레스나흐)는 숲에서 낳았다. 두 번째 역시 숲으로 가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쌍둥이를 낳게 됐는데 그것 자체가 이래저래 불안한 기운을 자아내게 한다. 햄넷(자코비 주프)과 주디스(올리비아 라인스)가 태어난다. 주디스는 처음엔 사산된 줄 알았으나 간신히 살아난 아이였던 만큼 체질이 약하다. 햄넷과 주디스는 쌍둥이가 그렇듯 늘 붙어 다니는 아이들이다. 둘은 서로 남자와 여자 옷을 바꿔 입고 아빠인 윌이 자신들을 알아보는지 시험하는 놀이를 하곤 한다. 둘의 이 ‘놀이’는 결국 죽음조차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햄넷은 병에 걸려 숨이 넘어가는 주디스의 침대에 같이 누워 잠을 자다 주디스 대신 자신이 죽는다.

감독 클로이 자오는 영화에서 아녜스가 해산(解産)하는 장면과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고 간호하는 장면을 ‘다소 길다 싶을 만큼’ 많은 분량으로 할애하고 있다. 아녜스는 첫 아이 수재나를 숲속에서 낳을 때도 혼자다. 햄넷과 주디스를 낳을 때도 윌은 그녀 곁에 있지 못한다. 아녜스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극한의 고통으로 울부짖고 몸부림친다. 특히 햄넷을 낳은 뒤 또 한 번의 진통으로 주디스를 몸 밖으로 밀어낼 때는 기진맥진이 극에 달할 정도이다. 아이들이 아프고 죽음의 경계를 오갈 때 아녜스는 혼이 나간다. 그러다 결국 햄넷을 잃었을 때 아녜스는 아이를 낳을 때 이상으로 고통의 절규를 터뜨린다. 영화는, 삶이라는 것이 고통으로 시작해 종종 터무니없는 상실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녜스의 시어머니이자 윌의 어머니인 메리(에밀리 왓슨)는 아녜스가 아이를 낳을 때, 그리고 아이가 죽어갈 때 그녀 옆을 지킨다. 메리는 큰 손녀 수재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지만,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아주 쉽게 거둬 가기도 한단다. 그러니 늘 조심해야 한다.” 삶은 (잉태와 출산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상실의 연속이다. 그 두 가지가 없는 인생은 없다는 얘기이다.

윌이 쓰는 희곡 역시 고통의 산물이다. 아녜스가 겪은 비극과 슬픔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작품에 새겨 넣는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고통 없는 예술 또한 없다. 예술은 고통을 먹고 자란다. 그건 예술을 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고통이라는 상념, 상처와 상실의 경험, 그로 인한 슬픔과 갈등 자체를 기반으로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고통 없는 진정한 예술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거나 몰랐었다. 삶의 고통과 비극이 위대한 예술의 전조(前兆)라는 것을 처음으로 개념화 한 사람이 어쩌면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아녜스가 출산의 고통을 겪는 것에 비해 윌이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영화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건 상당히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윌의 고통’은 극 후반 그가 펼치는 연극 <햄릿>의 무대를 통해 클라이맥스로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감독 클로이 자오의 그 같은 스토리텔링은 효능감이 높은 선택이었다. 감정을 한참이나 응집시킨 뒤 한 번에 터뜨리게 하는 효과를 준다. 이 영화에서 아녜스와 윌의 스토리 분량은 황금비율이다. 윌에게 시선이 더 가게 했다면 영화는 그렇고 그런 예술영화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 <햄넷>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탄생 비화, 그 얘기를 넘어 결국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예술인데, 예술이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진리의 회전 논리를 입증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희곡 『햄릿』의 그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는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무엇이 어찌 됐든, 사람은 늘 그 경계에서 고통받는 영혼임을 강조하는 얘기이다. 윌은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자신 역시 햄넷의 죽음을 이어갈지 말지를 고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죽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갈등할 때만큼 고통스러울 때는 없다. 희곡 『햄릿』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결국 그가 살아 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아녜스도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승화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윌은 아내를 위해, 자신을 위해, 모두를 위해 <햄릿>을 완성한다.

셰익스피어에게 햄넷 혹은 햄릿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이 일찍 죽음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위대한 문학이 나왔다는 식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무엇보다 그 서사를 어떻게 이어가게 했을까,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영국 작가 매기 오패럴이 쓴 동명의 소설이다. 뛰어난 문학은 늘 대단한 영화를 만들게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샘 멘데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둘 다 스토리를 구성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들이다. 그들이 한눈에 알아본 문학작품이었다는 이야기이다. 3월 15일에 있을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 캐스팅상) 후보에 올랐다. 만약 이 영화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탄다면, 아카데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민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트럼프 같은 비이성적, 야만적 체제를 이겨내는 방법은 오로지 인(간)성의 회복밖에 없다는 인문주의적 선포나 다름없다. 유독 이번 아카데미의 선택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