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4일 경기 남양주 수도권119특수구조대가 마련한 모의 화재 현장에 높이 1.9m, 길이 3.3m의 붉은색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 물을 뿌려 차체 온도를 낮추더니 건물을 향해 거대한 물대포를 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소방청에 기증한 원격 화재 진압 장비 ‘무인소방로봇’이다.
현대차그룹이 개발한 인공지능(AI) 무인소방로봇이 재난 현장에 본격 투입됐다. 생사가 오가는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을 대신해 진압에 나서는 특수 로봇이다. 올해 4대를 시작으로 전국 소방서에 100대를 전달할 계획이다. 자동차 메이커를 넘어 로봇, 무인기 등 피지컬 AI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큰 그림이 하나둘 현실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800도 불길 뚫는 첨단 로봇

현대차그룹은 이날 수도권119특수구조대에 소방청과 공동 개발한 무인소방로봇 4대를 기증했다. 현대로템의 다목적 무인차량 ‘HR-셰르파’를 화재 진압용으로 개조한 장비다. 무게 2.25t, 최고 시속 50㎞인 이 로봇은 화재 현장에서 초동 진압을 담당한다. 500~800도 고열에도 끄떡없다. 자체 분무 노즐로 수막을 형성해 장비 온도를 50~60도로 낮춘 덕분이다. 적외선 카메라는 짙은 연기에도 발화 지점과 구조자를 정확히 식별해 낸다. 물대포는 50m 떨어진 발화 지점까지 닿는다.
정 회장은 기증식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투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소방관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를 일깨워 준다”며 “무인소방로봇은 현대차그룹의 핵심 기술을 집약해 ‘사람을 살리는 기술’을 구현한 새로운 모빌리티”라고 설명했다. 김승룡 소방청장 직무대행은 “재난 대응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라고 말했다.
◇정의선 “할 수 있는 것 다 하겠다”
이날 기증한 로봇 4대 중 2대는 이미 수도권과 영남 119특수구조대에 배치돼 실전 투입됐다. 지난달 30일 충북 음성에 있는 공장 화재 현장에서 진화 작업을 벌였고, 지난 23일 밀양 산불 현장에도 출동했다. 나머지 2대는 다음달 초 경기 남부 및 충남 소방본부에 배치한다.현대차그룹과 소방청은 무인소방로봇이 투입되면 소방관 인명 피해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지난 10년간 순직하거나 다친 소방관은 1802명에 이른다. 정 회장은 “고군분투하는 소방관들을 위해 자동차와 기계를 만드는 회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성능을 개량해 100대 정도를 전국에 투입하겠다”고 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를 피지컬 AI 선도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원년으로 삼고 변신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달 산하 로봇기업인 보스턴다이내믹스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CES 2026 무대에서 공개한 데 이어 소형 모빌리티 로봇 플랫폼 ‘모베드’를 올 상반기 양산한다. 험난한 지형에서도 안정적으로 주행하는 모베드는 배송, 순찰, 영상 촬영 등에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로봇개 ‘스폿’과 웨어러블 로봇 ‘엑스블 숄더’는 현대차 울산 공장 등에서 사용 중이다. 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이 무인소방로봇을 시작으로 업종별 특화 로봇을 속속 내놓을 것으로 예상한다.
남양주=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