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화재 진압용 무인소방로봇을 재난 현장에 투입한다. 극한의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을 대신해 진압에 나서는 첨단 모빌리티다. 올해 4대 기증을 시작으로 향후 전국에 100대까지 보급 규모를 대폭 늘린다.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로보틱스와 인공지능(AI)을 결합한 ‘피지컬 AI’ 기술로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구상이 담겨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은 24일 경기 남양주 수도권119특수구조대에서 소방청과 공동 개발한 무인소방로봇 4대를 공식 기증했다. 현대로템의 전동화 다목적 무인차량 ‘HR-셰르파’를 화재 진압용으로 특수 개조한 장비다. 기존에 방산 부문에서 주로 활용되던 모빌리티를 재난 대응용으로 진화시켰다. 이날 기증식에는 정 회장과 이용배 현대로템 사장, 김승룡 소방청 소방청장 직무대행 등 주요 관계자가 총집결했다.
800도 불길 뚫는 첨단 로봇
무인소방로봇은 전장 3.3m, 전폭 2.0m, 전고 1.9m에 장비 중량은 2.25t에 달한다. 2t이 넘는 육중한 덩치에도 최고 시속 50km로 화재 현장을 신속하게 돌파하며 초동 진압 임무를 수행한다.이 로봇은 방수포, 자체 분무 시스템, 시야 개선 카메라 등 화재 진압 특화 장비를 두루 갖췄다. 섭씨 500~800도에 육박하는 고열 환경에서도 자체 분무 노즐로 로봇 외부에 수막을 지속 형성해 장비 온도를 50~60도로 낮춘다. 적외선 센서 기반 상단 카메라는 짙은 연기를 뚫고 발화 지점과 구조 대상자를 정확히 식별해 낸다. 여기에 고열을 견디는 특수 타이어와 6륜 독립구동 인휠모터 시스템을 장착해 장애물이 많은 사고 현장에서의 원격 주행 성능을 극대화했다. 전면부의 방수포는 직사 및 방사 형태로 제어가 가능해 최대 50m 물대포를 쏘며 다양한 화재 양상에 대응한다.
정 회장은 기증식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투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소방관분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를 일깨워 준다”며 “무인소방로봇은 현대차그룹의 핵심 기술을 집약해 ‘사람을 살리는 기술’을 구현한 새로운 모빌리티”라고 설명했다.
기증된 로봇 4대 중 2대는 수도권 및 영남 119특수구조대에 즉각 배치돼 실전 투입을 시작했다. 지난달 30일 충북 음성 소재 생필품 제조 공장 화재 현장에 투입돼 진화 작업을 벌였고 지난 23일 밀양 산불 현장에도 출동했다. 나머지 2대는 다음달 초 경기 남부 및 충남 소방본부에 추가 배치된다. 지난 10년간 화재로 부상을 입거나 순직한 소방공무원은 1802명에 달한다. 무인소방로봇이 고위험 현장에 선제 투입되면 소방관의 인명 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정의선 "제조업 역량 총동원"
정 회장은 이날 행사를 마친 뒤 이어진 취재진과의 질의응답에서 소방관 안전 확보에 대한 각별한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전폭적인 소방 장비 지원에 나선 계기를 묻는 질문에 "전국 곳곳의 현장과 일반 주택 화재를 보며 안타까운 경험이 많았다"며 "고군분투하시는 소방관님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털어놨다. 이어 "소방관분들이 가장 힘드실 텐데, 자동차 회사이자 기계를 만드는 제조업체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단순한 일회성 시범 도입에 그치지 않겠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정 회장은 "이번 4대로 시작해 장비 성능을 더욱 개량한 뒤 100대 정도를 전국에 투입하는 것이 목표"라며 "현대로템에서 장비를 좀 더 잘 개발해 소방관분들이 안심하고 일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이 하드웨어 제조 역량에 AI를 접목해 인류의 안전이라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승룡 소방청장 직무대행은 "재난 대응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패러다임 대전환의 첫 걸음"이라며 "민간과 소방 당국의 혁신적 연대를 통한 첨단 과학 기술 도입을 가속화하겠다"고 했다.
정 회장도 무인소방로봇의 향후 고도화 방향으로 피지컬 AI 기술의 전면적인 융합을 꼽았다. 그는 피지컬 AI 관련 추가 구상을 묻는 질문에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도 "앞으로 소방 로봇에 AI 기술과 로보틱스 기술이 훨씬 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기술 고도화를 통해 향후 붕괴 우려가 있는 구조물이나 산소가 부족한 밀폐된 지하 화재 현장 등 내연기관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곳까지 투입 범위를 대폭 넓히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은 소방관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전방위로 확대 중이다. 2023년 소방관 회복지원차 10대를 전국에 기증했고, 2024년에는 배터리 팩을 뚫고 물을 분사하는 관통형 전기차 화재 진압 장비 'EV 드릴 랜스' 250대를 독자 개발해 지원했다. 오는 6월 개원하는 국내 최초 소방관 전문 의료기관 '국립소방병원'에도 맞춤형 차량과 재활장비를 대거 투입할 예정이다.
남양주=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