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날
철길에서 시작된 시간 여행, 근대 익산을 걷다
익산역을 나서 길 하나만 건너면, 오래된 골목에 시간이 내려앉는다. 1912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세워진 이리역(현 익산역)을 중심으로 중앙동 일대는 급격히 성장했다. 철도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통로였지만, 동시에 도시를 형성한 축이기도 했다. 이리역과 익산군청, 이리방송국, 중앙시장 등이 자리하며 형성된 근대도시의 흔적은 오늘날 ‘익산문화예술의 거리’로 이어진다. 중앙시장에서 남부시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편집숍과 전시 공간, 근대 건축물이 나란히 서 있다.


2024년 12월 문을 연 익산시민역사기록관은 그 상징적인 공간이다. 1930년 건립된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와 창고를 재생해 농업 도시 익산과 철도 도시 이리의 성장, 이리역 폭발 사고와 민주화 운동, 1995년 익산시 출범까지 도시의 굴곡을 9000여 점의 기록으로 보여준다. 3층 목조건축 공간은 영화 <동주> 촬영지로도 사용됐다. 나무 바닥을 밟으며 걷다 보면, 개인의 삶과 도시의 시간이 겹쳐진다.

익산문화예술의 거리 끝자락에는 ‘솜리여행자쉼터’가 있다. 짐 보관소와 미디어아트실, 포토존 등 다양한 시설을 갖췄으며, 치킨특화거리가 조성된 남부시장 맞은편이라 여행지로서도 금상첨화다. 내년에는 2층 공간에 게스트하우스도 문을 연다니 익산 여행 거점으로 더욱 성장할 모습이 기대된다.


솜리여행자쉼터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황등석산전망대는 또 다른 얼굴의 익산이다. 채석장이 남긴 거대한 절개면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SNS 핫플로 떠올랐다. 현재도 채석이 이뤄져 내부에는 들어가볼 수 없고, 평탄한 산책로를 따라 현대 도시가 빚어낸 독특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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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백제의 꿈과 드라마 한 장면

함라마을은 돌담길과 고택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김병순·조해영·이배원 가옥으로 불리는 ‘삼부잣집’은 근대기 부농 가문의 삶을 보여준다. 그중 조해영 가옥은 내부 관람이 가능해, 사랑채와 행랑채, 문간채 등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당시 상류 농가의 생활 질서를 읽을 수 있다. 전통 한옥에 외래 문화가 스며든 흔적 또한 또렷하다. 인근 함라한옥체험단지에서는 온돌방과 침대방을 갖춘 숙박 체험이 가능해, 고택의 분위기 속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차로 4분 거리의 익산교도소세트장은 함라마을처럼 뚜렷한 제 공기를 지닌 곳이다. <7번방의 선물>, <신의 한 수>, <내부자들>, <시그널〉등 내로라하는 수많은 영화,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감시탑과 운동장, 취조실과 면회실이 실제처럼 재현돼 내부에 들어서면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법정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돼 가족 단위 방문객의 발길도 이어진다.<br />

관광 권역으로 익산을 나눈다면, 큰 축에 백제 왕도가 포함될 것이다. 금마면에 위치한 미륵사지는 무왕 대 창건된 백제 최대 사찰로 세 탑과 세 금당을 나란히 배치한 독특한 가람 구조를 갖췄다. 지난 2009년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에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미륵사의 건립 연대를 밝혀낸 중요한 자료인 한편, 무왕의 아내가 신라 선화공주라는 설을 흔드는 발견이기도 했다. 미륵사지 내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자리해 출토 유물과 흥미로운 기획 전시로 미륵사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미륵사지에서 약 5km 떨어진 왕궁리 유적은 백제 후기 왕궁 터로 일찍이 오층석탑과 함께 주목받아 온 곳이다. 남북 약 490m, 동서 약 240m 규모의 담장 안에 정전 건물지와 생활·의례 공간, 정원 유적이 체계적으로 배치됐다.

주요 상징물인 오층석탑은 지난 1965년 해체·보수 과정에서 사리병과 금동불상,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국보급 유적지로서 이후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어지며 이곳이 단순한 사찰 유적이 아닌 왕궁 공간임이 점차 드러났다.

유적지 입구에 자리한 백제왕궁박물관에서는 그동안의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궁궐의 구조와 생활상을 설명한다. 왕궁리 유적 발굴은 현재도 진행 중으로, 백제 왕도의 익산의 윤곽은 더욱 또렷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상미 기자 vivi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