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수 끝에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았어요.” 지난 20일 서울 대치동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매번 한 자릿수 점수를 받다가 이번에 40점대를 받아 합격했다”며 “기쁘면서도 얼떨떨하다”고 했다. 수험생은 예비 초교 4학년. 초교 때부터 고교 수학 선행 심화 학습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H수학학원 레벨테스트 얘기다.
초교생 학부모 사이에선 해당 학원에 다니느냐가 학생의 수준을 확인하는 ‘지표’가 된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2월 H학원 전국 지점에서 초교 2~3학년을 대상으로 동시에 치른 시험에 각각 9232명, 5712명이 도전했다. 2월 시험에선 약 37%의 학생만 학원에 다닐 자격을 얻었다.중간만 해도 먹고살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는 불안감이 사교육 시장을 키우고 있다. 저성장 국면에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 상위 1% 인재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에 많은 학부모가 ‘과열 경쟁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자녀에 대한 과잉 투자는 사상 최대 규모 사교육비로 확인된다. 학령인구는 감소하는데 사교육비는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2024년 초·중·고교 사교육비 총액은 29조2000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사교육비 지출 격차가 교실 내 학업 격차로 이어지고, 이는 또다시 소득 격차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 영어캠프·선행학습 등 자녀 '성공 로드맵' 지키려 사활
유아 사교육비만 年 3.3조원
“아이가 어머님이 보고 싶다고 하네요.”유아 사교육비만 年 3.3조원
지난 20일 오후 5시 서울 도곡동 H 영재원. 수업에 들어간 4세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불안해하자 강사는 급히 부모를 찾았다. 부모가 “블록 놀이를 잘 마치면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달랜 후에야 아이는 다시 수업에 들어갔다. 유명 사고력 수학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선행 학원’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유모차가 여러 대 주차돼 있었다.
오후 6시 인근의 M 사고력 수학학원. 수업을 마친 원생이 신난 발걸음으로 나오면서 이후 일정을 묻자 부모가 답했다. “오늘은 저녁 식사 후 ‘홈워크’(숙제학원)에 가는 날이야.” 건너편 G 영어학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캐리어를 끌고 하원하고 있었다.
◇“빨리…더 빨리”
상위 1%에 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교육 연령대는 더 낮아지고 있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4세 고시’ ‘7세 고시’ ‘학원 고시’로 이어지는 관문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여겨서다.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는 2012년 23만6000원에서 2024년 47만4000원으로 약 두 배로 증가했다. 영유아 사교육비는 빠진 수치다. 지난해 교육부가 발표한 ‘2024 유아 사교육비 시험조사’에 따르면 3개월간 유아 사교육비 총액은 8154억원이었다. 시민단체들은 연간으로 환산하면 유아 사교육비 규모가 3조3000억원 수준일 것으로 추정한다.학부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성공 로드맵’에서의 이탈이다. 예비 초등 4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강모씨는 지금까지 자녀 교육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로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은 것을 꼽았다. 맞벌이 가정이라 사립초에 보냈는데, 입학 이후부터 자녀가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킹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고자 ‘하와이 한 달 살기’ 등 해외 체험 경험도 늘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영어유치원에서 미국 초등학생 수준으로 영어를 습득해 온 친구들과의 격차를 메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이스 이탈을 막고자 초등학교 때 고등학교 수학 선행학습에 집중하기 위해 영어유치원(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다니고,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를 보기 위해 생후 20개월부터 등록할 수 있는 영어유치원 준비반(프렙학원)에 간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숙제 과외를 하고, 방학 때마다 하와이, 말레이시아 등지로 영어 캠프를 간다.
◇불안을 먹고 자라는 사교육
서울 대치동 학군만의 얘기는 아니다. 경기도에서 7세 자녀를 키우는 직장인 김모씨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자녀를 교구 중심의 수학학원에 보냈다가 당황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사고력 수학학원에서 선행학습한 탓에 수준이 맞지 않으니 보충수업이나 개별 과외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학원은 학부모의 불안감을 파고든다.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초1, 수학 머리를 만드는 골든타임’ ‘중고등 수학을 판가름하는 3학년 수학’ 등의 홍보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당국이 인공지능(AI) 시대에 대비해 논·서술형 평가를 확대한다고 하자 초등학교 국어학원 체인으로 유명한 G 학원은 지난 연말 초등 전문 AI 독서문해학원 100곳을 동시에 개원했다.
자녀가 ‘좋은 직업’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부모의 불안감이 사교육 시장을 키우고 있다는 실증 분석 결과도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교육 의존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고찰 및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의 경쟁압력 점수가 1점 증가할 때 자녀의 사교육 비용은 2.9% 늘어났다. 부모의 경쟁압력은 입시 경쟁에서 발생하는 부모의 불안감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한성민 KDI 연구위원은 “한국 사회는 ‘성공의 문’이 좁은 구조”라며 “자녀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의 불안과 경쟁 심리가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사교육은 불안감을 먹고 자란다”며 “AI 시대에 미리 대비해야 급변하는 시대에 생존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사교육업계의 새로운 연료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재연/라현진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