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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고 새로운 어머니의 탄생…착한 마녀도 나쁜 마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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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고 새로운 어머니의 탄생…착한 마녀도 나쁜 마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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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손길과 자애로운 표정 뒤에서, 어머니는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2018)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원작보다 더 도발적이고 복잡한 작품으로 거듭났다.

    마르코스 무용단 건물이 미로처럼 얽힌 여러 개의 방을 숨기고 있듯 이 영화 역시 겹겹이 쌓인 의미의 층위를 품고 있다. 두 시간 반이 넘는 런닝타임 내내 관객은 절단된 신체, 꺾인 팔다리를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관객을 몸서리치게 하는 것은 목과 분리된 몸뚱이가 내뿜는 분수 같은 선혈이 아니다. 모성이란 이름 아래 숨겨진 폭력을 발견할 때, 우리는 세상과의 연결을 잃고 절망한다.




    영화 초반, 카메라는 벽에 걸린 액자를 비춘다. 수지(다코타 존슨)가 떠나온 집에 걸린 액자다. 액자에 쓰인 문구는 의미심장하다. “어머니는 그 누구의 자리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자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어머니라는 자리가 보편적인 동시에 개별적임을 암시하는 문구다. 여성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며, 모성 역시 단일한 본질로 정의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다. 모든 남성을 단일한 범주로 환원할 수 없듯, 모든 여성을 단일한 범주로 환원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머니는 동시에 ‘그녀’이기도 하다.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일 때, 다른 어머니는 자식의 목을 조른다.



    여성의 경험은 계급과 인종, 종교와 세대라는 여러 겹의 그물이 얽혀 만들어지는 복잡한 지형도와 같다. 이른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 불리는 이 개념은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날카로운 시선이다.

    주인공 수지의 여정은 이 시선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미국 오하이오, 종교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아미쉬 공동체를 떠나 그녀가 도착한 곳은 베를린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해방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예속이다. 어머니의 감시에서는 벗어났으나 수지는 곧 알게 된다. 자신이 ‘마르코스 무용단’이라는 거대하고 기괴한 모성 권력의 품으로 걸어 들어갔음을.


    수지는 오디션에 합격하고 단숨에 무용극 <폴크(VOLK)>의 주연 자리에 오른다. 무용단원들과 운영진의 관계는 확장된 모녀 관계를 연상시킨다. 서로를 질투하고 반목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애정과 연대를 나눈다.

    여성 간의 정서적 역학은 복잡하게 작동한다. 마담 블랑(틸다 스윈튼)과 수지의 관계는 여성 관계가 지닌 여러 측면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블랑과 수지의 첫 만남 장면에서 두 사람의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매혹이 손으로 만져지는 듯하다. 구아다니노 감독 특유의 감각적 연출이 만들어낸 물성(物性)이다.




    거울과 유리창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반사된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지 못한다. 스승과 제자, 어머니와 딸, 연인과도 같은 이 관계의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서로에게 이끌리면서도 경계하고, 신뢰하면서도 의심하는 양가적 감정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무용 교사들은 단원들의 꿈속으로 침투해 그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딸의 무의식에까지 침투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닮았다. 어머니의 목소리, 어머니의 시선, 어머니의 욕망은 딸의 내면 깊숙이 각인되어 딸들의 정신세계를 재구성한다.

    마르코스 무용단을 이끄는 운영진은 마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마녀는 국가와 가부장제에 박해받은 여성을 상징한다. 마녀는 여성 억압의 역사를 상징하는 동시에 저항과 주체성의 아이콘으로 재전유(再專有)되는 존재다.

    그러나 영화 속 마녀들은 남성의 권력을 차용하고, 가부장제의 권위를 흉내 낸다. 마녀들이 클렘페러를 대하는 방식을 보라. 마녀들은 그를 조롱한다. 클렘페러가 무용단원 패트리샤(클로이 모레츠)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여성이 진실을 말할 때 망상이라고 했다”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클렘페러는 패트리샤의 증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유일한 인물이다. 세상이 그녀의 이야기를 망상으로 치부할 때, 그는 패트리샤의 이야기에 진실의 핵심이 있다고 믿는다. 클렘페러는 망상, 꿈, 실수 같은 비합리적 현상 속에서 무의식의 증언을 읽어낸다. 패트리샤의 망상은 병리적인 동시에 진실을 말하는 증후다. 그녀가 보는 환영, 그녀가 느끼는 피해 의식은 무용단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두운 권력을 반영한다.

    마녀들은 여성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독점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구조를 재생산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만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폐쇄적 순혈주의는 결국 자기모순의 늪에 빠진다.

    외부와 단절된 채 내부의 권력 구조를 성찰하지 않는 페미니즘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가부장제의 폭력을 답습한다. 무용단원 사라(미아 고스)는 마르코스 무용단을 사랑이 넘치는 가족 공동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자 클렘페러는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 가장 깊은 배신이 있음을 말한다.



    무용극의 제목 <폴크(VOLK)>는 독일어로 ‘민족’ 혹은 ‘국민’을 의미한다. 영화는 무용단원의 신체를 통해 전체주의적 미학을 재현한다. 아름답고 강한 신체를 지닌 무용단원들은 붉은 끈으로 결박된 듯한 모습으로 춤을 춘다. 그들의 도약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군무에서 우리는 나치 시대의 다큐멘터리 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작품을 떠올린다.

    각각의 신체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용해되고, 움직임은 엄격하게 통제된다. 파시즘의 미학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개인의 자율성을 말살하고 전체에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용단원들의 활력 역시 봉쇄되고, 움직임은 제한된다.

    마담 블랑은 말한다. “아름다움과 기쁨을 깨부숴야 한다.” 이는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움의 환상을 파괴하는가? 조화로운 형식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그 형식을 해체하고 폭력적 진실을 드러내는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마르코스의 부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는 살육장으로 바뀐다. 아름다움이 그로테스크함으로 전환되는 이 장면은 관객에게 극도의 불편함을 선사한다.





    진정한 예술은 관객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과 대면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피의 살육이 끝난 뒤, 새로운 어머니로 거듭난 수지는 살아남은 단원들에게 말한다. 춤을 추라고. 그들이 추는 춤이 아름답다고. 이제 그들의 춤은 억압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육신은 욕망을 마음껏 분출한다.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움직임. 이것이 수지가 긍정하는 아름다움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무용단원들은 설명할 수 없는 신체 증상을 겪는다. 경련과 환각을 포함한 신경증적 증상은 공동체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단원들의 무의식적 노력이다. 의식이 억압한 것은 증상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이 중에서도 올가의 신체 변형 시퀀스는 충격적이다. 수지가 스튜디오에서 춤을 추는 동안, 카메라는 두 개의 공간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위층에서 수지가 격렬하게 춤을 출 때, 아래층 거울방에 갇힌 올가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수지의 동작을 따라 한다. 수지의 몸짓 하나하나가 올가의 신체에 물리적 폭력으로 작용한다.

    거울로 둘러싸인 밀실은 올가가 파괴되는 모습을 무한히 반사한다. 카메라는 냉정하게 그 과정을 기록한다. 수지의 팔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를 때 올가의 팔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꺾인다. 수지가 바닥을 구를 때 올가의 척추는 뒤틀린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비명, 톰 요크의 불협화음이 공포를 증폭시킨다.

    구아다니노는 이 몽타주를 통해 공감(empathy)의 왜곡된 형태를 보여준다. 한 사람의 예술적 환희가 다른 이의 신체적 고통으로 연결된다. 이는 공동체 내부의 역학을 시각화한다. 누군가의 열정과 성공은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세워진다. 공동체의 환희는 개인을 억압하는 도구다.

    변형된 올가의 신체는 영화 내내 무용단 지하실에 방치된다. 완전히 부서졌지만 죽지 않은 채로. 이 기괴한 생존은 공동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지속성을 상징한다. 공동체는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 다만 당신을 부수고, 뒤틀고,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채 살려둔다.



    영화가 제시하는 모성은 아름답지 않다. 희생과 헌신으로 포장된 전통적 모성 상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 모성이란 탐욕스럽다. 어머니는 문자 그대로 딸을 집어삼킨다. 딸의 젊음, 딸의 생명력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수지가 제시하는 새로운 모성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어머니로 등극한다. 필요한 것은 주고, 불필요한 것은 거둬들인다. 패트리샤를 포함한 젊은 단원들이 극심한 고통과 피로로 죽음을 원할 때, 수지는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을 때처럼 자연스럽다.

    수지는 요제프 클렘페러에게 망각을 선사한다. 클렘페러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나치 시대에 유대인 아내를 구하지 못한 죄, 살아남았다는 죄로 그는 오래 고통받았다. 수지는 그에게 과거를 잊게 해준다. 이것이 새로운 모성의 얼굴이다. 죽음과 망각으로 죄인들을 돕는 것. 루카 구아다니노는 인터뷰에서 <서스페리아>가 모성에 관한 영화이며, 페미니즘은 선악을 포함한 여성의 복합적 속성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희생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양육자이면서 파괴자다. 이러한 복합성을 인정하는 것, 여성을 이상화하거나 악마화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여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출발점이다.

    구아다니노가 쌓아 올린 미장센은 여전히 아름답다. 촬영 감독 사욤브 무크디프롬은 채도를 극도로 낮춘 팔레트를 사용한다. 회색빛 거리를 배경으로 서있는 탈색된 건물들이 1977년 베를린이 지닌 역사적 무게감을 표현한다. 화면에서 유독 강렬하게 돋보이는 것은 붉은색이다. 무용단원들을 묶는 붉은 끈, 의식 장면에 쓰인 붉은 조명, 그리고 마지막 살육 신에서 분출되는 붉은 피가 무채색 배경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그 대비는 이 영화가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 즉 생(生)과 죽음, 해방과 예속, 아름다움과 잔혹함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진실을 증언한다.





    <서스페리아>는 우리를 끝까지 안도하게 하지 않는다. 착한 마녀도 나쁜 마녀도 없다. 수지의 새로운 모성이 해방인지 또 다른 지배의 시작인지, 영화는 마지막까지 답을 유보한다. 관객은 스크린 앞에 남겨진 채, 자신이 어떤 모성의 품에서 길러졌는지, 혹은 지금도 길러지고 있는지를 묻는다.

    모성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그랬듯 아름답고 따뜻하게 들린다. 그러나 구아다니노는 그 이면에 손을 뻗어, 우리가 외면해 온 뒤틀린 욕망과 권력의 민낯을 끄집어낸다. 영화관을 나서는 우리의 목덜미에 누군가가 뻗친 손이 닿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이수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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