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Berlinale)에서 튀르키예 출신 독일 감독 일케르 차탁이 '옐로 레터스'(Yellow Letters)로 최고 작품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단은 21일(현지시간) 밤 독일 베를린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황금곰상을 비롯한 8개 부문 수상작을 발표했다. 독일 감독이 황금곰상을 받은 것은 2004년 파티 아킨 감독의 '미치고 싶을 때'(Head-On) 이후 22년 만이라고 DPA통신은 전했다.

옐로 레터스는 튀르키예에서 국가 권력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연극인 부부가 생존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며 가족 해체의 위기를 맞는 이야기를 그렸다. 튀르키예어로 제작된 이 작품은 국가의 탄압 아래 예술가의 양심과 선택을 정면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차탁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아니라 독재자들에 있다"며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서로 싸우지 말고 그들과 싸우자"고 덧붙였다.

황금곰이 최고 작품상에 해당하는 반면 은곰상은 작품·감독·연기·각본·예술적 기여 등 여러 부문으로 나뉘어 주어진다. 영화제 측이 영화의 메시지 뿐 아니라 창작 과정의 다양한 성취를 폭넓게 조명하기 위해 채택한 구조다.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은 튀르키예 에민 알페르 감독의 '샐베이션'(Salvation)에 돌아갔다. 은곰상 심사위원상은 미국 랜스 해머 감독이 알츠하이머 환자와 가족 이야기를 다룬 '퀸 앳 시'(Queen at Sea)가 받았다. 은곰상 감독상은 '에브리원 디그스 빌 에반스'(Everyone Digs Bill Evans)의 그랜트 지 감독이, 주연상은 '로즈'(Rose)의 산드라 훌러가 수상했다. 그는 2006년에 이어 두 번째 은곰상 주연상을 수상했다. 조연상에는 '퀸 앳 시'의 애나 콜더 마셜과 톰 코트니가 공동 수상했다. 각본상에는 '니나 로자'를 쓴 제네비에브 뒬뤼드-드 셀레스, 예술공헌상에는 미국 다큐멘터리 '요: 러브 이스 어 리벨리어스 버드'(Yo: Love Is a Rebellious Bird)가 호명됐다.

베를린영화제는 최근 동시대 정치·사회적 의제를 내건 작품을 연이어 황금곰으로 선정해왔다. 2023년에는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의 'On the Adamant', 2024년에는 마티 디옵 감독의 'Dahomey', 2025년에는 다그 요한 하우게루드 감독의 'Dreams (Sex Love)'가 각각 황금곰을 받았다. 올해 역시 국가 권력과 개인의 윤리를 다룬 작품이 최고상을 차지하면서 베를린 특유의 정치적 문제의식이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올해 영화제의 또 다른 화두는 '예술가의 정치적 발언'이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빔 벤더스 감독이 개막식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전쟁 관련 질문을 받자 "우리가 정치판에 들어설 수는 없다"고 답했던 것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로 인해 영화제 기간 내내 팔레스타인 문제와 각국의 독재 정권을 둘러싼 정치적 발언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알페르 감독은 21일 시상식에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뒤 튀르키예 수감 반체제 인사들과의 연대를 표명했으며 독재 아래 신음하는 이란 국민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을 언급했다.
한국 영화계 인물들도 존재감을 보였다. 홍상수 감독의 '그녀가 돌아온 날'은 파노라마 섹션 공식 초청작으로 공개됐고 정지영 감독이 제주 4.3 참상을 그린 '내 이름은'은 포럼 섹션에 초청됐다. 배우 배두나는 경쟁 부문 국제심사위원으로 참여해 황금곰과 은곰 수상작 선정 과정에 함께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