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이 고생하다 잘 돼서 기분이 좋아요. 극장이 텅텅 빈 것만 보다가 북적이는 걸 보니 울컥하더라고요. 관객들이 '역시 영화는 극장서 보는 게 재밌지' 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우리와 같은 중견 감독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지난 설 연휴부터 '휴민트'로 관객을 만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은 작품 개봉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극장의 풍경을 먼저 이야기했다. 500만 관객을 돌파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에 밀려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봉 이후 이어진 무대인사 일정은 강행군이지만 그 시간을 유독 즐겼다. "예전엔 배우들이 객석을 돌며 사진을 찍어주면 괜히 민망해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차라리 같이 따라다니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게 낫죠. 배우들 놓친 분들까지 챙기자고 하면서 같이 다녔어요."
방금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표정과 말투, 악수의 온도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반응이다. 그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배우들과 관객 반응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연휴라 좌석이 가득 찬 상영관을 볼 때면, 단순한 흥행 이상의 감정이 올라온다고.

'휴민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한 첩보 액션이다. 인간 정보 활동을 뜻하는 휴민트를 중심에 두고, 국정원 요원과 북한 인물들이 얽히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전작 '베를린'을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공간이 지정학적으로 맞닿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이 등장했죠. '베를린'을 기억하는 분들에겐 작은 이스터에그가 될 수 있겠죠."
'베를린2'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없다고 했다. "열린 결말로 끝난 영화라 각자 상상 속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 과장을 연기한 조인성에 대해서는 각별한 신뢰를 드러냈다. "'모가디슈'와 '휴민트'를 함께하며 같은 궤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배우가 이제는 뺄셈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구나 싶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스타였죠. 오랜 시간 스타로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이를 참 잘 먹더라고요. 해외 로케이션 몇 달씩 가면 힘든 순간이 오는데, 내색을 안 해요. 오히려 주변을 챙겨요. 이번엔 첫 번째 롤로서 책임감도 더 컸고요. 저는 그가 전체를 버텨주는 뿌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반면 박정민은 예상 밖의 지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까지 멜로 서사가 강하게 올 줄은 저도 몰랐어요. 본인도 몰랐을 겁니다. 절제를 많이 해야 하는 역할이었죠. 액션 장면에서는 계속 '이걸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고 부추겼어요. 스스로도 놀랐을 거예요."
채선화를 연기한 신세경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안정감 있고 굉장히 단단하다. 북한 사투리 구현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준비가 철저하고, 디렉션을 주면 정확히 구현해낸다. 다른 배우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정도였다"고 평했다.

이번 영화에는 웃음 코드가 거의 없다. 류 감독은 의도된 선택이라고 했다. "'베테랑'처럼 유머로 환기하는 방식 대신, 긴장감으로만 끌고 가보자는 도전이었어요. 얼마나 서스펜스를 유지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던진 숙제였죠."
그는 "현란한 기교를 부리기보다 본질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깔롱부리지 말자, 젊은 척하지 말자고 촬영감독과 거듭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숏폼 콘텐츠가 일상이 된 시대, 2시간 넘는 영화는 불리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더 배우가 중요하죠. 누군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힘. 긴장을 통해 얻는 재미도 있어요. 2시간 동안 관객과 팽팽하게 밀고 당길 수 있느냐는 결국 배우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반 인신매매 경매 장면이 불편했다는 반응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자극적으로 소비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죠.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를 많이 고민했어요. 관객이 더 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도 배웁니다. 그런 의견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데뷔 이후 줄곧 액션 장르를 개척해온 그는 "액션은 여전히 힘들다"고 털어놨다.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위험하기도 하죠. 그래도 누군가 새로운 걸 해내면 왜 나는 저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는 스태프와 배우의 안전을 위해 직접 몸을 던져보기도 한다고 했다. "제가 한 번 구르면 '저 정도는 안전하구나' 안심하죠. 힘든 현장에서 작은 이벤트가 되기도 하고요."
의외의 고백도 이어졌다. "데뷔 이후 한 번도 키스 신을 찍은 적이 없어요. 조인성과도 '키스 신은 어떻게 찍냐'고 농담했죠. 이번 영화의 감정선이 제 멜로 수위의 최대치예요."
다만 "'베를린' 이후 시간이 흐르며 이별을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사람이 떠날 때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가, 그 질문이 이번 작품에 스며 있다고.

원작 없이 오리지널 각본만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웃으며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미 누군가 하고 있다. 보는 눈은 다 있다"고 답했다. 반복을 경계하려는 태도이자, 자신의 취향을 지키려는 선택이다.
관객 반응이 영화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 그는 이렇게 비유했다. "목욕탕 같은 거 아닐까요. 예전엔 때 밀고 바나나우유 먹던 세대가 있었죠. 지금은 안 가도 사는 시대예요. 그렇다면 더 좋은 무언가를 제시해야죠. 무관심이 제일 위험해요. 영화를 두고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자신에 대한 관객들의 높은 기대치에 대해서는 "낮은 것보다 낫다"고 했다. 그는 "건강한 비판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자주 하는비유인데 '한 대도 안 맞고 챔피언이 되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제게 높은 기대치가 있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류감독은 현재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각본을 계속 수정하고 있다. 예전엔 작품 끝나자마자 바로 들어갔는데 이제는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웃었다. 다만 "'휴민트'를 하고 나서 여한이 없어진 것 같다. 해보고 싶은 건 다 해 봤다. 그러다 보니 다음 작품은 조금 더 즐기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싶다"며 "유아기를 벗어난 느낌"이라고 귀띔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