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날 아침 풍경이 달라졌다. 색동 한복이 차지하던 자리를 레이스와 튤이 겹겹이 쌓인 드레스가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여아들이 있다. 이 나이대 아이들에게 '설빔'은 전통 의상이 아니라 "공주가 되는 옷"으로 자리 잡았다.
설 명절을 앞둔 주말 서울의 한 대형마트 아동복 매장은 새 옷을 사려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이어졌다. 유치원생 자녀와 동행한 지모 씨는 "마음 같아선 한복을 입히고 싶었지만, 공주 드레스만 고집하는 아이에게 결국 두 손 들었다"며 "한복과 비슷한 가격에 더 자주 입을 테니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도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한때 명절이면 으레 입히던 아이들 한복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해외에선 'K-컬처' 트렌드가 확산하며 한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정작 국내 설빔 시장에서는 정반대 양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10살 이전 여아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부모들 사이에서는 흔히 '공주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이'로 통한다.

부모들 입장에서도 어쨌든 드레스는 명절 하루 입고 마는 복장이 아니라는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복은 설과 추석을 제외하면 일상생활에서 입을 일이 마땅치 않지만, 드레스는 역할 놀이와 직결되는 데다 생일 파티나 유치원 행사 등에도 입을 수 있어 보다 '실용적'이다.
유통가 분위기도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엔 설 명절을 앞두고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한복 기획전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이젠 드레스와 원피스가 그 자리를 꿰찼다. 한 업계 관계자는 "5년 전만 하더라도 매장마다 한복 행사를 열었지만 요즘은 드레스 수요가 더 많다"고 귀띔했다.
판매 수치도 변화한 시류를 드러낸다. 이랜드리테일에 따르면 여아 브랜드 '로엠걸즈'의 2월 누적 원피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2% 증가했다. 카디건·니트 등 상의는 42% 늘었고 스커트도 15% 성장했다. '명절용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번 입는 옷'을 찾는 소비가 분명해졌다는 분석이다.
반면 한복은 일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 돌잔치나 명절같이 손에 꼽는 행사에만 등장한다. 그렇잖아도 한 철 입으면 이듬해엔 입기 어려운 아동복인지라 설·추석 두 차례 정도 입으면 작아진다. 체감 가격이 더 비싸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때문에 그나마 남은 한복 수요도 중고 시장으로 흡수되고 있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한복을 찾고 있다는 곽모 씨는 "예쁘고 세련된 한복은 한 벌에 10만원을 훌쩍 넘어간다"며 "아이는 빠르게 크는데, 10만원 넘는 새 옷을 명절마다 사기엔 부담스러워 중고 거래부터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중고로 나오는 한복들도 대부분 한 두 차례 입은 것들이라 별로 거부감이 없다"고 덧붙였다.
수도권 최대 한복·주단 시장인 광장시장마저 설 연휴를 앞두고 한적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아동 한복은 재고 할인이 아닌 이상 상·하의 한 벌에 5만원을 넘어간다. 그나마도 대부분 공장에서 양산된 제품이고 자체 디자인을 적용했거나 손 자수 등이 들어가면 10만원을 가볍게 넘긴다.
한 상인은 "과거에는 명절을 앞두고 한복을 찾는 손님이 많았지만 이젠 아이 한복 맞추러 오는 손님이 손에 꼽는다"며 "그나마 매장을 찾는 고객은 손자·손녀에게 한복을 해주려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라고 털어놨다. 아동 한복 수요가 줄면서 대부분 업체가 혼수용 한복 취급점으로 재편됐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아동복 업계는 이러한 소비 변화에 발맞춘 신상품을 발 빠르게 선보였다. 로엠걸즈는 트위드 재킷과 보석 장식 샤 원피스를 결합한 '공주 설빔' 등을 선보였고, 아이러브제이도 명절 시즌을 맞아 아벨리 트윙클 원피스 등 로맨틱 드레스 라인을 강화했다.
업계 관계자는 "고물가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일상 활용도가 낮은 옷에 지출하기를 꺼리는 소비자가 많이 늘었다"며 "활용도가 높고 아이들도 선호하는 드레스가 새로운 설빔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