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에 성공하기 전까지 하늘을 나는 일은 사실상 도박에 가까웠다. 유럽과 미국의 발명가들은 나무와 천으로 만든 날개를 몸에 달고 언덕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이 예상과 조금만 달라도 추락 사고로 이어졌다. 실패는 곧바로 현실의 부상과 죽음으로 돌아왔다.
반면 오늘날 항공기 한 대가 하늘에 오르기까지 겪는 실패의 대부분은 현실이 아니라 컴퓨터 속 가상 공간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항공기 개발 과정에서는 수치해석과 시뮬레이션으로 구성된 디지털 환경에서 난기류, 엔진 정지, 번개 피격, 조류 충돌 같은 극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실제 기체는 부서지지 않지만, 공기역학·구조역학·열역학 등 물리 법칙은 현실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항공 당국의 인증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실제 비행시험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이전 단계의 설계·검증·위험 분석은 대부분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뤄진다. ‘가상에서 충분히 실패한 뒤’에야 항공기는 활주로에 오르는 셈이다.
이런 시뮬레이션 기술이 최근엔 인공지능(AI)과 로봇 산업으로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현실의 물리 법칙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해 로봇에게 무한한 경험을 제공하는 ‘월드 모델(World Model)’이 등장하면서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신의 시뮬레이터”라고 부른다. 피지컬 AI 시대를 여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다.
데이터 한계를 깨는 ‘가상 세계 공장’

기존 생성형 AI는 텍스트와 이미지 같은 정적인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강점이 있었다. 하지만 로봇과 자율주행처럼 현실 세계에서 움직여야 하는 AI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학습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특히 중력, 마찰, 충돌, 탄성, 관성 같은 물리 법칙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엔비디아의 ‘코스모스(Cosmos)’, 구글 딥마인드의 ‘지니(Genie) 3’ 같은 최신 월드 모델은 텍스트나 이미지 한 장만으로도 물리 법칙이 반영된 3차원(3D) 가상 공간을 생성한다. 단순한 영상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컵을 밀면 어떻게 될지”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이 기술의 파괴력은 ‘합성 데이터’에서 드러난다. 현실에서 로봇이 컵을 100만 번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려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하지만 월드 모델 안에서는 비용 없이 수천, 수만 번의 실험이 가능하다. 실패 비용이 ‘0’인 공간에서 사실상 무한한 경험을 압축 학습하는 셈이다.
텍스트 데이터가 고갈되고, 실제 로봇 행동 데이터는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월드 모델은 데이터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희귀 재난 상황, 무중력 환경, 복잡한 산업 설비 사고 등 현실에서 재현하기 어려운 장면도 무한히 생성해 학습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제조·자율주행·재난 대응…산업 전반 재편
월드 모델이 바꾸는 산업 지형은 빠르게 바꾸고 있다. 자율주행 분야에서는 미국의 자율주행 택시 기업 웨이모처럼 수십억 km에 달하는 가상 주행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방식이 이미 표준이 됐다. 100년간 운전해도 마주치기 어려운 사고 상황을 매일 반복 학습한다.제조업에서는 공장을 짓기 전 가상 세계에서 먼저 가동시킨다. 로봇 팔 동선, 설비 배치, 마찰 계수까지 시뮬레이션해 최적의 공정 레시피를 찾는다. 디지털 트윈을 넘어 ‘물리 지능 트윈’으로 진화하는 단계다.
재난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화재 현장에 투입된 로봇이 붕괴 가능성을 실시간 예측해 가장 안전한 경로를 계산하는식이다.
월드 모델이 단순한 AI 모델이 아니라, ‘현실을 복제하는 거대한 계산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GPU, 물리 엔진, 합성 데이터 생성 기술이 결합된 차세대 AI 플랫폼인 셈이다.
韓 기업들도 K-월드 모델 구축 노력
월드모델 구축 경쟁에 국내 기업들도 속속 뛰어들고 있다. 단순히 해외 모델을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자체 물리 시뮬레이션 역량과 산업 데이터를 결합해 ‘한국형 월드 모델’ 구축을 모색하는 움직임이다.NC AI는 게임 물리 엔진에서 축적한 시뮬레이션 기술을 기반으로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나섰다. 가상 환경에서 로봇과 자율 시스템이 학습할 수 있는 고정밀 물리 세계를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엔터테인먼트용 그래픽을 넘어 산업 적용이 가능한 엔지니어링 수준의 정밀도를 목표로 한다.
클라우드 인프라 측면에서는 NHN 클라우드와 네이버클라우드가 GPU 기반 대규모 연산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월드 모델은 대규모 물리 계산과 합성 데이터 생성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만큼, 고성능 GPU 클러스터가 필수적이다. 국내 데이터센터에서 이를 자급화하려는 시도다.
디지털 트윈 영역에서는 네이버랩스가 도시·실내 공간을 정밀하게 복제하는 공간지능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 현실 공간을 3차원으로 스캔·모델링하고 로봇 운영 데이터까지 결합하는 방식은 월드 모델과 결합될 경우 물리적 정확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제조 현장 데이터 확보도 관건이다. 포스코 등 대형 제조기업들은 공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지털 트윈과 AI 최적화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다. 이런 산업 데이터가 월드 모델 학습에 투입될 경우 단순 가상 시뮬레이션을 넘어 실제 생산 공정에 즉시 적용 가능한 ‘산업형 월드 모델’로 진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