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한남동 글래드스톤 갤러리 외벽에 형형색색의 콩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듯 모두 다른 모습의 강낭콩이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다양한 콩과 마주한다. 하나의 줄기를 나눠 가진 두 강낭콩에 들어찬 콩알은 다양한 서사와 문화로 관람객을 반긴다. 해골부터 부엉이, 앵무새, 신화 속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들까지 모두 벨기에 출신 작가 캐스퍼 보스만스가 그려 넣어 완성한 세계다.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에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개인전 ‘Peas, Pod’에선 콩을 모티프로 한 회화와 벽화, 조각 등이 펼쳐진다. 유럽에서는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지만, 국내 관객과는 처음 만나는 자리다. 그 설레는 만남을 몇 시간 앞둔 작가 캐스퍼 보스만스와 아르떼가 만났다.
“파사드에 그려진 콩을 보고 들어온 사람들이 다양한 시리즈의 콩을 발견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콩 안에 그려진 요소들로 여러 서사를 경험하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즐길 수도 있고요. 이렇게 다채로운 콩들이 있으니까 전시가 마치 ‘야채 샐러드’같죠?(웃음)”

샐러드에 빗대 재치 있게 소개했지만, 작가의 작품은 사람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민속 예술, 실버포인트Silverpoint나 파티나 등 전통 기법에 관심이 많다. 여기에 성 정체성에 대한 유년 시절의 기억, 시간과 사랑에 대한 사유, 벨기에 명문 예술 대학 앤트워프 왕립 예술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Fine Arts Antwerp)에서의 경험이 더해져 그의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방패에 새겨진 가문의 정체성, 강낭콩으로
작가는 한국 관객과의 첫 만남을 위해 벽화를 준비했다. 전시장 지하와 1층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는 그가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작업해 5일 동안 완성한 것. 벽화는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벽화는 사람을 완전히 감싸 안는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건물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보는 이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잖아요. 저는 벽화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던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매우 포용적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나 제작할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죠. 저는 벽화를 제작할 때 항상 면 분할이나 색상 조합이 담긴 레시피를 만들어요. 이것만 있으면 누구나 전 세계 어디서든 벽화를 그릴 수 있죠.”


갤러리 벽에는 작가가 심취해 있는 문장학(Heraldry)을 반영한 콩들을 그렸다. 문장학은 중세 유럽에서 기사와 귀족들이 가문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던 상징 체계와 그 규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방패에는 가로나 세로로 분할된 면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가문의 문장(Crest)에서 유래한 규칙들인데요. 문장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면을 나누는 작업이에요. 서로 결합하거나 합쳐지는 가문들의 정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함인데요. 이 법칙들을 벽화에 그대로 적용해 봤습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레전드 페인팅(Legend painting)’ 연작 역시 다양한 상징 체계를 결합해 완성했다. 그중 사자와 닭이 함께 그려진 작품은 왕자를 교육할 때 사용된 알레고리, 즉 우화적 상징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한 것. 중세인들은 사자를 왕이나 신과 같은 통치자로,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울었던 수탉은 ‘배반’이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이해했다.
“누군가는 이런 상징을 구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죠. 이러한 방식을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재해석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라고 믿어요.”
달콤살벌한 반쪽짜리 붉은 남자
그는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한다.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을 즐긴다.
“간혹 표면적으로 매우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들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이런 이야기가 진짜로 다루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란 누군가의 무의식이나 트라우마를 다루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듣고 자란 ‘반쪽짜리 붉은 남자’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덩치가 아주 크고 악마에 가까운 형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에 작가는 강렬함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다르게 바라보기로 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주 색다른 재료, 달콤한 시럽을 활용했다. 오닉스를 깎아 위아래 반으로 나뉜 남성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안에 핑크색과 초록색의 시럽을 부어 작품을 완성했다.
“이 이야기의 ‘반쪽’이라는 표현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어쩌면 제가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랐던 “넌 진정한 남자가 아니야”라는 말과 연관된다고 느끼기도 해요. 저는 퀴어(Queer)로서 이 이야기가 손상되거나 불완전한 사람, 혹은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이야기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을 뒤집어 달콤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앤트워프에서 쌓은 작가로서의 덕목
작가는 드리스 반 노튼, 마틴 마르지엘라 등 패션과 예술계에 유수한 아티스트를 배출한 앤트워프 왕립 예술 아카데미를 거치며 자신만의 문법을 구축했다. 앤트워프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회화의 기초부터 관람객의 의견을 수용하는 능력까지 작가가 지녀야 하는 다양한 면모를 가르쳤다. 특히 그는 패션학과 회화 복원학을 공부하며 습득한 지식들이 지금의 작품 세계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미술품을 복원할 때는 여러 각도로 분석해야 해요. 어떤 화학용품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도 공부해야 하고요. 그 과정에서 회화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접근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패션학과 친구들이 런웨이를 올릴 때면 모델도 해 주고, 바느질도 도와주면서 디자이너들이 받게 되는 옷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을 함께 들었어요. 관람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작품에 반영하는 것을 즐기는 지금의 습관은 당시의 경험 덕분인 것 같아요.”


한국을 방문한 작가는 델보와의 협업도 이어간다. 13점의 브리앙(Le Brillant) 백과 땅페트(Le Tempete) 백 위에 '뮤추얼리즘'을 주제로 산호와 불가사리, 당나귀와 별, 달과 하늘 등을 직접 그려넣은 13점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지난 6일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 서울에 마련된 델보 팝업 매장에선 라이브 페인팅도 선보였다. 지난 해에 이어 올해로 두번째 호흡을 맞추게 된 델보와의 작업 역시 관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녹아 있다.
"저는 작품을 직접 만지며 느끼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보통 전시장에서는 작품에 손을 댈 수 없잖아요. 반면, 패션은 관객이 충분히 만지고 입으며 경험할 수 있는 예술 작업이라는 점에서 제게 무척 가치 있게 다가옵니다."

잡히지 않는 '시간'의 시각화
그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들은 주로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필이 발명되기 전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이 사용하던 실버포인트나 브론즈에 파티나를 입히는 방식이 그 예다. 은으로 된 와이어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실버포인트 기법은 산화될수록 더 짙은 색으로 변하고, 구리나 청동과 같은 금속 역시 부식하면서 자연스럽게 색조가 나타난다. 작가는 매우 추상적이고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마주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제 삶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어요. 시간은 제 작업의 시작부터 저를 이끌어온 ‘사랑’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요. 사랑은 미래를 바라보는 감각이에요. ‘내일도 당신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라는 보장이자, ‘우리가 함께했던 어제는 정말 아름다웠지’, 혹은 ‘우리 함께했던 그해를 기억해?’라고 묻는 일이죠. 시간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죠. 그래서인지 시간의 개념을 시각화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들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전시는 3월 14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