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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술만 도입하면 다 될 줄 알았죠?"…억만금 들인 혁신이 쪽박 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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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술만 도입하면 다 될 줄 알았죠?"…억만금 들인 혁신이 쪽박 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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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쩍이는 모니터 수백 개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모든 화면에 '정상'을 알리는 초록색 불빛이 깜빡인다. 17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된 영국 BBC의 '디지털 미디어 이니셔티브(DMI)' 프로젝트 관제실의 풍경이다. 보고서상으로 이 혁신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현장의 직원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불편한 시스템을 외면했고, 시스템에 데이터를 입력하느라 정작 방송 제작은 뒷전이 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이 거대 프로젝트는 단 하나의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통째로 폐기됐다.




    왜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조직들이 이토록 황당한 실패를 반복하는 것일까? 90억 달러를 들인 GM의 로봇 공장은 왜 멈춰 섰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 인공지능(AI) 챗봇 '테이'는 왜 16시간 만에 퇴출당했을까? 15년간 LG그룹의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며 조선·철강·전자·화학·배터리 등 산업 현장의 대형 혁신 프로젝트를 지켜본 저자 박종성은 <혁신은 왜 실패하는가>를 통해 그 근본적인 원인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저자는 혁신의 실패가 특정 개인의 무능이나 조직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대신 그는 우리가 공통으로 빠지는 구조적 인지 오류를 '메타 착각'이라 명명한다. 이는 한마디로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도 전에 기술이라는 해답부터 들이미는 습성'을 뜻한다. 손에 '최첨단 기술'이라는 멋진 망치를 쥐고 나니, 세상의 모든 현안이 그저 박아야 할 '못'으로만 보이는 현상이다.


    이 책은 1900년대 전기 혁명부터 오늘날의 생성형 AI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기술 앞에서 반복해온 다섯 가지 메타 착각을 흥미로운 사례와 함께 소개한다. 첫째는 '도구만 바꾸면 생산성이 저절로 높아진다'는 착각이다. 도장 문화에 집착한 나머지 '도장 찍는 로봇'을 만든 사례나, 낡은 업무 방식은 그대로 둔 채 메타버스 오피스만 도입한 메타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본질을 바꾸지 않은 기술 도입은 비효율을 디지털로 더 정교하게 고착시킬 뿐이다.

    둘째는 '데이터와 복잡한 시스템 속에 정답이 있다'는 믿음이다. 데이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수집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숫자만 쫓다 보면 BBC의 사례처럼 현장과 동떨어진 '서류상의 성공'에만 매몰되게 된다. 셋째는 '인간의 개입을 없애는 것이 효율적이다'라는 생각이다. 자동화 시스템은 인간의 실수를 줄여줄 것 같지만,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서는 무력해진다. 우버의 자율주행차 사고나 아군을 공격한 패트리엇 시스템의 비극은 인간의 판단을 '비용'으로만 치부했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보여준다.



    네 번째 착각은 '좋은 제품은 스스로 시장을 만든다'는 기술 만능주의다. '세그웨이'와 '퀴비'의 실패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세그웨이는 당시 스티브 잡스조차 "PC만큼 혁신적"이라 극찬했던 1인용 전동 스쿠터였다. 하지만 보도에서 타기엔 빠르고 차도에서 타기엔 위험한 애매한 위치, 비싼 가격 탓에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결국 '지구촌 이동 수단의 혁명'이라던 호언장담은 사라지고 소수 마니아나 경비원들이 타는 비싼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퀴비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주머니 속 영화관'을 표방하며 할리우드의 거장들과 손잡고 만든 이 숏폼 스트리밍 서비스는 출범 전부터 수조 원의 투자를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유튜브와 틱톡에 익숙한 대중은 굳이 유료로 10분짜리 영상을 보려 하지 않았고, 퀴비는 출시 6개월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도 사용자의 실제 필요와 삶의 맥락을 읽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뼈아픈 교훈이다.

    마지막 착각은 '리더가 밀어붙이면 혁신은 따라온다'는 믿음이다. 이런 압박은 시스템을 한꺼번에 바꾸려는 '빅뱅식 혁신'의 파국을 초래한다. 저자는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할 때 체면 때문에 채찍을 드는 리더십이 혁신을 어떻게 도박으로 변질시키는지 경고한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단순히 실패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처방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각 장 끝에 수록된 '사전 부검(Pre-Mortem) 체크리스트'가 대표적이다. 프로젝트가 이미 망했다고 가정하고 그 원인을 미리 추적해 보는 이 과정은, 낙관론에 취해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균열'을 직시하게 만든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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