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를 앞두고 기업들의 ESG 경영 고도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특히 시스템 구축을 통한 데이터 관리 역량 강화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SG 데이터의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공시 자체가 기업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재무 데이터가 전사적 자원관리(ERP)와 내부 통제 시스템을 통해 관리되듯 ESG 데이터 역시 표준화·검증·추적이 가능한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SK텔레콤은 ESG추진실 산하 지속가능경영팀을 중심으로 지난 1월 ESG 데이터 통합 플랫폼을 구축했다. 금융위원회가 오는 4월 ESG 공시 로드맵 확정을 예고하는 등 국내 공시 의무화 논의가 구체화되는 흐름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서다.
연결 기준 공시 대비 ‘표준화’가 출발점
플랫폼 구축의 출발점은 데이터 표준화였다. ESG 공시가 연결 기준으로 확대되면서 데이터 정확성과 기준 통일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존 ESG 데이터는 수기 관리 비중이 높았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이력 확인이나 산출 기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김용진 SK텔레콤 지속가능경영팀 팀장은 “SK텔레콤과 자회사, 계열사가 사용하는 ESG 데이터 기준이 서로 달라 데이터를 통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구성원 채용 지표만 해도 회사마다 연령 기준이나 고용 형태 구분 방식이 달랐다. 같은 지표처럼 보이지만 정의가 다르면 통합 관리가 불가능하다.
플랫폼 구축 과정에서는 다양한 공시 기준을 동시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기준은 기후 공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글로벌 지속가능성 보고(GRI) 기준은 지속가능성 전반을 포괄한다. 공시 범위가 확대될수록 데이터 항목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에 SK텔레콤은 ‘지표 다이어트’ 전략을 선택했다. 박재환 SK텔레콤 매니저는 “활용성이 낮은 지표는 줄이고 핵심 지표 중심으로 재정비했다”며 “필수 항목은 유지하면서 실무 활용도를 높이는 구조를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280개 지표·1000개 데이터… AI로 활용도 높여
플랫폼은 ESG 지표 약 280개를 관리하며 이를 구성하는 세부 데이터는 약 1000개에 달한다. SK텔레콤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기후정보공개보고서를 기준으로 데이터 범위를 설정했고, SK그룹 및 자회사 데이터세트와의 호환성을 고려해 구조를 설계했다.
SK텔레콤은 데이터의 ‘양’보다 ‘활용성’을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사내 AI 시스템을 접목했다. 박 매니저는 “지표 산출 기준을 매뉴얼 대신 AI 챗봇으로 즉시 확인할 수 있다”며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연도별 데이터 추이 분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플랫폼은 ESG 데이터의 약 50%를 사내 시스템 연계를 통해 자동 취합한다. 자동화 범위는 현업 담당자 인터뷰를 통해 선별했다. 여러 시스템을 조합해야 하거나 민감 정보가 포함된 데이터는 여전히 사람의 판단이 필요하다.
ESG 데이터 시스템 구축에서 가장 까다로운 과제는 무결성 확보다. 원본 데이터의 정확성과 시스템 반영 과정, 최종 산출 수치의 신뢰성을 모두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ESG 데이터 입력 시 전년 대비 이상값 알림 기능을 구축하고 결재 시스템과 연동해 담당 부서 책임자가 승인하도록 했다. 또 데이터 산출 기준 제공, 담당자 이력 관리, 증빙 첨부 기능 등을 포함해 내부 통제 체계를 강화했다.
통신 산업의 특징도 ESG 플랫폼 구축에 반영했다. 통신 산업은 직접 배출보다 전력 사용에 따른 간접 배출 비중이 크다. 통신사는 전국에 분산된 네트워크 장비를 24시간 운영해야 한다. 이재형 SK텔레콤 매니저는 “전국 통신장비 사이트마다 매달 전력 데이터를 취합해야 한다”며 “플랫폼을 통해 장비 유형, 지역, 요금제별 분석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통신업 특성상 데이터 취합 난이도도 높다. 네트워크 장비 수와 설치 지역이 방대해 에너지 사용 데이터를 세분화해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이를 기반으로 에너지 효율 개선 전략과 재생에너지 전환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ESG 데이터는 ‘경영 인프라’
데이터 주권과 소버린 AI 논의 속에 ESG 데이터가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다. SK텔레콤은 이를 리스크 판단의 핵심 자료로 보고 내부 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AI 전환(AX) 전략과도 연결된다. ESG 플랫폼은 자회사까지 적용돼 향후 그룹 차원의 데이터 통합 기반이 될 전망이다.
[인터뷰] 엄종환 SK텔레콤 ESG추진실장
“ESG는 유행이 아니라 실체 증명하는 경쟁 영역”- ESG 경영 흐름을 어떻게 보나.
“한때 ESG는 유행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실체와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단계다. 탄소배출권거래제 환경 변화로 배출권 가격은 상승하고 무상 할당은 축소되는 흐름이다. ESG는 기업의 비용 구조와 직결된다. 결국 기업은 탄소 감축과 에너지 효율 개선을 통해 비용을 줄이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는 전략 차원에서 ESG를 바라보게 된다.”
- ESG 데이터 통합 플랫폼을 만든 이유는.
“ESG 공시가 현실적으로 눈앞에 와 있다. 재무 지표가 시스템을 통해 정확성과 신뢰성을 담보하듯, 비재무 지표 역시 동일한 수준의 신뢰를 요구받는다. 플랫폼은 향후 SK그룹 전체가 데이터를 연결하고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효율성을 높이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 ESG 데이터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개별 수치의 정확성도 중요하지만 감축 노력의 ‘추이’가 더 중요하다. 기업이 어떤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흐름이 있어야 한다. 숫자가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이 신뢰를 만든다.”
- ESG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ESG는 유행이 아니라 실체를 증명해야 하는 경쟁 영역이다. 이제 ESG는 비용 절감과 사업 포트폴리오 최적화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ESG 조직은 앞으로 투자자와 이해관계자에게 신뢰받는 ESG 데이터를 생산·관리하고, ESG 측면의 리스크를 분석해 선제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팀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승균 한경ESG 기자 cs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