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9월 26일 충남 태안군 안흥시험장. 굉음을 내며 미사일이 발사됐습니다. 3분간의 적막. 그리고 무전이 들어왔습니다. 180km 거리의 목표지점(무인도)에 정확히 떨어졌다는. 현장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눈시울을 붉혔고,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백곰 1호’로 불리는 한국의 첫 탄도미사일 발사 순간은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세계 7번째 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됐지만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미국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북아 군비 경쟁을 우려한 미국은 한국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첨단 기술 전수’를 명분으로 ‘한·미 미사일 협정’이 체결됩니다.
사거리는 180km, 탄두 중량은 500kg으로 제한했습니다. 서울에서 쏘면 딱 평양까지만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사거리 제한은 42년간 이어졌습니다.
한국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사거리를 줄이면 탄두 무게를 늘릴 수 있다는 협정 개정 때 조항을 활용했습니다. 탄두 무게를 엄청나게 키운 비정상적(?) 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탄두가 무거우면 파괴력이 커집니다. 무게를 버티며 발사하는 기술도 확보했습니다. 그 결과가 현재 ‘현무-5’로 불리는 탄도미사일입니다. 재래식무기 중 전술핵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이렇게 견제를 뚫고, 변형과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했습니다.
방산뿐 아닙니다. 주력 산업인 반도체, 조선, 원전, 자동차 그리고 뷰티 산업도 다른 나라의 것을 가져다 혁신의 힘을 보태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K팝이 이끄는 K컬처에도 조합, 변형,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그런 한국의 주요 산업이 2026년 현재 동시에 빅 사이클에 올라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숫자가 말합니다. ‘7000억 달러’. 2025년 한국의 수출액입니다. 사상 최대였습니다. 올해도 이를 넘어설 전망입니다. ‘3조3000억 달러(4527조원)’. 2월 4일 기준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입니다. 독일을 추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습니다.
‘58%’. SK하이닉스의 4분기 영업이익률입니다. TSMC(56%)는 물론 애플의 이익률(30%)을 상회하는 기록입니다. ‘136조원, 100조원’. 조선업과 방위산업의 수주액입니다. 3, 4년 치 일감을 확보한 상태지요. ‘3억 달러’. 작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음반 수출액. 수치는 크지 않지만 문화산업이 미치는 파급력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수준입니다.
작년 초만 해도 한국의 주요 산업에 대한 전망은 비관적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상황이 변해 빅 사이클에 올라탄 이유는 아이러니합니다.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 한국이 세계화의 종말과 블록화 시대에도 수혜국이 된 것이니까요.
미국이 산업 생태계에서 중국을 배제함에 따라 한국의 제조업은 힘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으로 기획, 마케팅에 비해 제조업의 상대적 가치가 더 높아진 시대적 배경도 이었습니다. 물론 한국은 제조업을 버리지 않았고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여기에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한 것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배경입니다. 코스피 5000도 그 결과입니다.
‘준비된 자가 성공하면 사람들은 행운이라고 하고 준비가 없어 실패하면 불운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주요 산업의 빅 사이클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이클의 한계도 명확합니다. 글로벌 시장 환경의 변화, AI 기술의 진화 과정에서 특정한 국면에 진입한데 따른 수혜의 성격도 있습니다. ‘10년 후를 위해 우리는 어떤 씨를 뿌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한국이 갖고 있는 결핍의 힘입니다. 비옥한 땅도 천연자원도 없는 분단된 폐허에서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올라선 그 힘 말입니다.
에피소드 하나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광릉수목원에는 수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어느 날 이상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태풍이 불면 수목원에서 잘 보살피는 큰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나가는데, 수목원 길가에 있는 가로수들은 끄떡없었던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수목원 나무들은 인공적 보살핌에 길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뿌리가 약했습니다. 반면 가로수들은 누구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깊이 뿌리를 내린 결과 태풍에 강해졌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국가도 자연도 인간도 비슷합니다. 결핍이 주는 선물은 강인한 생존 능력이 아닐까요.
김용준 한경비즈니스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