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주요 가전 제조사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중국 가전 제조사들 공세가 거세지면서 과거 국내 기업들이 일본 전자 산업을 끌어내렸던 때와 겹쳐 보인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실제 중국 기업들은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기술 격차를 좁히고 시장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다만 국내 기업들은 프리미엄 경쟁력과 인공지능(AI) 기술력으로 차별화된 사용경험을 제공하는 데다 중국 공세에 맞서 적절한 중저가 대응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았을 때와는 '구도'가 다르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LG전자, 'TV·가전' 영업이익률 추락
5일 한경닷컴이 삼성전자·LG전자의 최근 5년간 TV·가전 사업 부문 실적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기초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흐름이 포착됐다. 중국이 해당 부문에서 덩치를 키우면서 입지가 줄어든 영향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5년간 TV·가전 사업 부문 영업이익률이 6%대에서 마이너스대로 곤두박질쳤다. 2021년 해당 사업 부문 영업이익은 3조6500억원, 영업이익률은 6.5%를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엔 영업손실만 2000억원일 발생하면서 영업이익률도 -0.3%를 나타냈다.
연도별 영업이익을 보면 2021년만 해도 3조원대를 기록하다 2022년 1조3500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이후 2023년 1조2300억원, 2024년 1조7000억원을 나타내다 지난해 적자 전환했다.
LG전자도 이와 유사했다. 2021년 LG전자 TV·가전 부문 영업이익은 3조3221억원, 영업이익률은 7.5%를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 영업이익과 영업이익률은 각각 5284억원, 1.2%로 추락했다. 최근 5년 중 영업이익(1조1350억원)과 영업이익률(2.5%)이 최저치를 보였던 202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LG전자는 TV 사업 부문에서 타격이 특히 컸다. 이 부문 영업이익이 '조 단위'를 기록한 때는 2021년(1조998억원)이 마지막이다. 이후 2022년 54억원, 2023년 3624억원, 2024년 3159억원을 나타내다 지난해 7509억원의 손실을 냈다.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6.4%→0%→2.5%→2.1%→-3.9%를 기록했다.

중국, 인수합병 전략으로 '가전 영향력' 확장 총력
삼성전자와 LG전자 성적이 추락하는 사이 중국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전 세계 TV 출하량 가운데 중국 TCL·하이센스·샤오미가 차지한 점유율은 31.8%. 삼성전자·LG전자를 합산한 점유율(28.5%)를 뛰어넘었다. 백색가전 판매량은 중국 하이얼이 선두를 달린지 오래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 분석을 보면 하이얼은 지난해 기준으로 18년 연속 냉장고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세탁기 판매량의 경우 17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중국 기업들은 과거 가격경쟁력으로 신흥시장을 공략하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제품들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후 유럽·북미 등 프리미엄 시장을 파고들면서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 공략에도 성과를 냈다는 분석이다.
로봇청소기와 같은 신흥 가전 분야에선 중국 기업들이 오히려 시장을 선점해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DC 자료를 보면 지난해 상반기 출하량 기준 점유율 1~4위 모두 중국 기업(로보락·에코백스·드리미·샤오미)이 휩쓸었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운 결정적 발판은 인수합병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자체 역량으로 일본을 추격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중국 기업들은 독자적 연구개발에 주력하면서도 인수합병 전략을 적극 활용해 영향력을 확장했다.
하이얼이 대표적이다. 하이얼은 일본 산요, 미국 GE, 뉴질랜드 피셔앤페이클, 이탈리아 캔디 등 글로벌 가전 업체들을 연이어 인수했다. 이후 2022년 전 세계 가전 시장에서 매출 기준 1위를 차지했다.
'韓 플레이북' 따르는 中…저가 공세 후 프리미엄 공략
중국이 한국의 일본 가전 산업 공략 플레이북을 따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 기업들은 과거 브라운관 TV 대신 LCD TV로 전환에 총력을 기울여 기술 패러다임 변화를 선도했다. 이는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국내 기업들이 TV 시장을 장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기에 일본보다 가격경쟁력에서 앞섰던 국내 기업들의 강점이 소비자들을 파고들었다.중국 TCL은 지난달 초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에서 '고급 LCD'인 미니 LED TV를 하이엔드 제품군으로 내세웠다.
통상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하이엔드 제품으로 본다. 하지만 TCL은 프리미엄 TV를 찾는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미니 LED도 하이엔드 제품'으로 인식하도록 변화구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OLED가 아닌 미니 LED TV로도 충분히 대화면의 시청경험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를 하이엔드 제품으로 앞세워 프리미엄 소비자층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TCL은 또 최근 소니의 홈 엔터테인먼트(TV·오디오) 사업을 분사해 신설 합작 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TCL이 51%, 소니가 49% 지분을 각각 보유하는 구조다. 소니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확보할 경우 TV 시장 내 선두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삼성전자·LG전자가 중저가 전략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다음 프리미엄 브랜드로 격상한 과거 행보와 유사하다.
품질 격차도 축소됐다. 미니 LED TV, 초대형 TV 등에서 더는 저가 이미지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AI 기반의 통합된 사용경험도 강조한다. 로봇청소기 분야에선 기술력이 오히려 앞선 상태다.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상황도 유사한 점으로 꼽힌다.

韓, 중국과 격차 유지…가격·AI 가전 등 대응 다변화
물론 과거 일본과 국내 기업들 상황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기술 패러다임을 여전히 국내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데다 경쟁 구도도 과거와 달라서다. 국내 기업들의 대응 전략도 다변화된 양상을 보이는 만큼 일본처럼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가능성은 비교적 작다는 관측이다. TCL이 미니 LED TV를 하이엔드 제품으로 포지셔닝을 시도하지만 OLED와는 질적 차이가 확연하다.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지난 CES 당시 기자들과 만나 "LCD는 절대 올레드를 이길 수 없다"며 "올레드의 기술 발전 로드맵도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AI 가전·사물인터넷(IoT) 생태계에서 삼성전자·LG전자가 구축한 경쟁 우위도 견고하다. 이들 기업은 자체 스마트홈 플랫폼을 고도화하면서 연결성이 뛰어난 통합된 사용경험을 계속해서 개선하고 있다.
경쟁 구도도 과거와 달리 복잡하게 형성돼 있다. 미국의 대중 관세와 같은 보호무역 기조는 국내 기업뿐 아니라 중국 기업에도 변수다. 삼성전자·LG전자 모두 지난해 연간 실적발표 당시 '미국 관세'를 가전 사업 부진의 한 요인으로 꼽았는데 이는 중국 기업들에도 골치거리다. 또 국내 기업들의 경우 메모리 등의 부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지만 중국은 일부 핵심 기술을 해외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일본 기업들은 한국의 공세에 가전 대신 다른 사업 부문에 힘을 싣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모색했지만 삼성전자·LG전자의 대응은 달랐다. 구독 형태로 가전 사용경험을 확장하는 전략으로 접근성을 높여 가격경쟁에 대응했다. 중저가 제품군도 확장했다. 국내 기업의 TV 평균판매단가(ASP)가 떨어지는 추세도 이 때문이다.
냉난방공조(HVAC) 등 기업간거래(B2B) 사업을 강화해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AI 기반의 가전으로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하려는 목표도 뚜렷하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이 일본을 누르고 가전시장을 재패했던 역사가 이제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 구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면서도 "삼성전자·LG전자는 기술력과 프리미엄 가전이란 경쟁력, 사업 다각화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이들이 '제2의 일본'이 될지 아니면 도약을 할지에 따라 향후 시장 지형이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