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나는 건축이란 형태라기보다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이 형태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조각에 불과하다.”</i>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이 짧은 선언은 이곳의 정체성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 1971년 건립 당시 그는 인근 고궁 및 한옥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기왓장 느낌의 전돌(검은색 벽돌)을 주재료로 삼았고, 인공적인 건축물과 자연이 상생하기를 바라며 외벽에 담쟁이덩굴을 심었다. 50년이 흐른 지금, 담쟁이가 벽돌의 틈새를 메우며 자라난 풍경은 그가 남긴 공생의 유산이다.

한국 건축사의 이정표와 같은 공간 사옥은 한때 경영난으로 인해 건물의 존치 자체가 불투명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으나, 김창일 회장의 안목으로 보존되었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국가등록문화재(제586호)로 지정되었다.
김창일 회장은 성공한 기업가이자 갤러리스트, 세계적인 컬렉터이자 '씨킴(CI Kim)'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그는 건축물 자체를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며, 매입과 함께 사옥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현대미술의 정수를 품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탈바꿈시켰다. 기획에 따라 작품을 대여하는 일반 미술관과 달리 한 개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응축된 '살아있는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아라리오뮤지엄의 가치는 더 빛을 발한다.
거장이 설계한 미로, 그 경계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
아라리오뮤지엄 구관의 내부는 정교하게 설계된 미로 같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법한 좁은 계단과 반 층씩 높이를 달리하는 스킵 플로어(Skip Floor)가 적용되어, 공간과 공간 사이를 문 대신 계단으로 연결한다. 내부를 거닐다 보면 느껴지는 작은 불편함은 인간의 몸 크기를 기준으로 설계한 휴먼 스케일(Human Scale) 때문이다. 이는 한국 전통 공간의 특징을 살린 설계로, 층고와 크기가 제각각인 공간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재미를 선사한다.

미로 같은 동선은 작품을 만날 때 더욱 극대화된다. 실제 차고였던 지하 공간에는 권오상 작가의 자동차 조각 작품인 <더 스컬프처(The Sculpture)>가 전시되어 있다. '진짜 차'가 머물던 자리에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가짜 차'를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옛 기능을 위트 있게 소환하고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한다.

좁은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자연광이 환하게 들어오는 넓은 공간을 마주한다. 과거 공간 사옥의 로비였던 이곳에서는 백남준 작가의 대표작인 TV 첼로를 비롯한 작품 4점을 만나볼 수 있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의 작품이 건축사무소 로비였던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은 중학교 동창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김수근 건축가와 백남준 작가의 오랜 우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키스 해링(Keith Haring), 마크 퀸(Marc Quinn), 신디 셔먼(Cindy Sherman), 코헤이 나와(Kohei Nawa) 등 동시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이 '살아있는 컬렉션'이 가진 압도적인 깊이를 체감하게 한다.

사계절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유리 건물
구관에서 전시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김수근의 제자인 장세양 건축가가 20년이라는 시간차로 건축한 신관을 마주한다. 외관상 흑색 벽돌의 구관과 대비되는 통유리 건물은 스승의 건축 철학인 ‘공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건물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유리를 전면에 사용해 창덕궁을 차경으로 두며, 자연의 변화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 건물은 현재 카페와 다이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김창일 회장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본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시각(미술), 청각(음악) 그리고 미각과 후각(미식) 등의 오감으로 전달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엄 옆 유리 건물에는 위치한 여러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예술적 감각을 오감으로 확장하는 통로이다. 특히, 유리 건물 5층에 있는 ‘더 그린테이블(The Green Table)’은 건축가 김수근이 지향했던 자연과의 ‘공생’, 그리고 김창일 회장이 추구하는 ‘오감의 미학’과 그 결을 같이 한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닮은 식탁: 더 그린테이블
2009년 가을에 문을 연 ‘더 그린테이블’은 김은희 셰프가 전국의 농장과 경동시장을 누비며 연구해 온 ‘코리안 프렌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테이블 수가 많지 않고, 공간을 채우는 차분한 클래식 음악 덕분에 온전히 식사에만 몰입하기 좋다. 어느 자리에 앉든 통창 너머로 담쟁이가 덮인 공간 사옥 구관이나 창덕궁의 고즈넉한 경치를 마주하게 되는데, 창밖으로 흐르는 계절의 변화를 식탁 위에서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테이블 위에는 모던 민화의 시초로 유명한 서하나 작가와 협업한 그림 카드가 한 통의 편지처럼 놓인다. 코스별로 만나게 될 음식들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민화 카드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맛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기분 좋게 차오른다.

본격적인 식사는 김희종 도예가의 백자합에 담긴 아뮤즈 부쉬로 시작된다. 모든 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복(福)’ 자를 새겨 넣은 합을 열면 버섯의 풍미가 응축된 수프가 먼저 속을 따뜻하게 달래준다. 보라색 작은 합에는 식감을 살리는 파마산 치즈 칩이 올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양송이와 새송이버섯을 잘게 다져 살롯과 소량의 버터와 생크림이 들어간 덕셀이 버섯의 인상을 더 짙게 그려낸다. 이어 고추장 아이올리를 곁들인 단새우 카나페가 녹진한 맛을 더하며, 겨울철 식재료만이 가진 묵직한 밀도가 입안 가득 전해진다.

‘여름 정원’은 이곳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시그니처 디시 중 하나다. 매일 자연과 함께 싱그러운 일상이길 바라는 셰프의 마음을 담아 수십 종의 허브와 채소를 작은 숲처럼 심어냈다. 마치 꽃꽂이하듯 예순 번 넘는 정교한 손길을 거쳐 완성되는 이 요리는 우리가 주재료로 생각하지 않아 무심히 지나쳤던 채소 각각의 고유한 향과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게 한다.

계절의 맛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애피타이저가 나올 즈음, 테이블 위 민화 카드를 다시금 한 장씩 넘겨본다. 그중 한옥 창살 무늬와 어우러진 카드 속 그림을 응시하다 시선을 들어 올리는 순간, 유리창 너머 실제 창덕궁의 풍경이 그림 위로 묘하게 겹쳐진다. 작가가 왜 창살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유추해 보고, 한국의 제철 음식을 담아내려는 셰프의 마음도 가늠해 보게 된다.
계절 애피타이저인 가리비 요리는 겨울 사과를 주재료로 삼아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팬프라잉 (Pan-frying)하여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익힌 가리비 관자에 로즈마리의 향을 입힌 사과 퓨레, 새콤달콤하게 마리네이드한 사과 조림, 그리고 위에 바삭한 사과칩을 곁들였다. 사과라는 한 가지 식재료가 보여주는 세 가지 질감의 변주는 깊은 계절의 맛을 느끼게 한다.
요리 제목부터 ‘시그니처 메뉴’인 다음 코스 요리에는 검은 보리와 귀리의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한 김은희 셰프의 오랜 노력이 깃들었다. 2시간 동안 천천히 익힌 검은 보리와 귀리가 알알이 입안에서 터지고, 팬에서 오래 조리해 맛있게 익은 연근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식감을 살려주며, 냉압착한 생들기름이 끝 향을 구수하게 감싸준다.

이어지는 메뉴 또한 이곳의 시그니처이다. 조선 시대 고조리서(古調理書)에서 영감을 얻어 재해석한 전복 만두다. 밀가루 피 대신 전복에 칼집을 내어 쪄낸 뒤, 그 속에 한우 안심과 죽순 등을 정성스레 채운다. 만두 위로 맑은 비프 콩소메가 부어진다. 무를 듬뿍 넣어 소화를 돕게 만든 채수에 소고기를 넣어 맑게 끓인 국물이 백자합에 담겨 음식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마지막 메인인 랍스터 요리는 코스의 서사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바다의 맛을 짙게 응축한 부야베스 소스와 버터의 풍미를 담은 뵈르블랑 소스가 이중주를 이루며, 탱글탱글한 랍스터의 식감을 입체적으로 살린다. 여기에 가니쉬로 곁들여진 시금치와 봄동의 파릇한 단맛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향해 나아가는 계절감을 완성한다. 몽블랑 디저트와 바질 아이스크림, 개성약과로 입안을 정돈하고 나면 거장의 유산 위에 차려진 ‘더 그린테이블’의 미식 서사도 끝을 맺는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보낸 하루는 예술을 향유하는 다섯 가지 감각, 즉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순간들로 가득 찬다.

김현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