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자동차 등 한국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11월 마무리된 한·미 관세협상을 일방적으로 뒤집은 돌출 발언이었다. 한국 국회의 입법 지연 등 지지부진한 대미 투자가 표면적 이유지만, 자국 기업 압박을 멈추라는 으름장의 성격도 있었다.미국 하원 공화당 법사위원회는 “쿠팡과 같은 미국 기업을 부당하게 표적으로 삼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논평했다. 쿠팡이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국세청 등 10여 개 정부 기관의 동시다발적 조사에 시달리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는 가짜 뉴스 근절을 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을 문제 삼았다. 개정된 법이 유튜브 등 자국 기업의 서비스를 제한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 정부나 정치권의 인식과 달리 한국의 규제는 국내 기업에 훨씬 더 혹독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방구석 여포’ 같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쿠팡은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을 금지하는 유통산업발전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이 회사가 ‘새벽 배송’처럼 대형마트와 차별화한 서비스를 내세울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 1위 업체 넷플릭스도 규제 사각지대에 있다. 전기통신사업법상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돼 방송법과 IPTV(인터넷TV)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광고 비율과 요금 체계를 자유롭게 뜯어고칠 수 있다.
그나마 있는 규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미국에 근거를 둔 글로벌 기업들은 내규를 만들어 규제를 우회하고, 과징금이 나오면 소송으로 맞서는 전략을 쓴다. 구글과 애플이 앱 장터 고유의 결제 방식을 강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 2021년 도입한 ‘인앱결제 강제 금지법’은 앱마켓 사업자를 겨냥한 세계 최초의 규제 법안이었다. 두 회사는 외부 결제를 허용하면서 26~27% 수수료를 별도로 부과하는 방법으로 신설된 규제를 무력화했다. 5%가 넘는 전자지급결제대행(PG)사 수수료를 더하면 구글과 애플의 인앱결제 요율(30%)을 넘어서는 탓에 외부 결제를 활용하는 사업자가 거의 없다. 국내 기업이라면 ‘괘씸죄’가 무서워서라도 시도하지 못했을 대응이다.
최근 또 하나의 규제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인공지능(AI) 분야 최상위법인 AI기본법은 자율주행, 의료, 에너지 등 파급력이 큰 분야에 AI 기술을 도입할 때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내외 기업이 모두 법 적용 대상이지만 시장 반응은 회의적이다. 안정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정부가 빅테크에 AI 알고리즘 공개를 요청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지렛대 삼아 자국 기업 차별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구할 경우 미국 기업 단속은 한층 더 힘들어진다. 애먼 한국 기업만 골탕을 먹는 기울어진 규제 운동장 상황이 고착한다는 얘기다. 미국 기업 규제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면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국내 기업 규제 수위도 낮추는 게 정석이다. 정부가 규제 입법을 할 때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규제 영향평가에 실효성과 형평성 항목을 넣고, 국내외 기업에 규제를 똑같이 적용하기 어려울 때는 적용 시점을 늦추는 등의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국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보조금을 퍼붓고 전쟁도 불사하는 시대다. 국내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첫걸음은 미국 기업에는 쩔쩔매면서 국내 기업에만 호통치는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