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험회사가 설계사, 법인보험대리점(GA) 등에 상품 판매를 대가로 지급한 수수료가 최근 5년 새 세 배로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보험 수수료가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일 한국경제신문이 금융위원회에서 단독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보험업계 모집 수수료는 2020년 10조원에서 지난해 32조원 규모로 치솟았다. 5년 만에 설계사와 GA에 뿌린 수수료가 세 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 업계 수입보험료는 1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보험사 매출(수입보험료)은 사실상 그대로인데 비용(수수료)만 급증한 셈이다.
보험업계 수수료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2023년 국내에 보험회계기준(IFRS17)이 도입되면서다. IFRS17 시행 후 보험사가 수수료를 과다 지급하더라도 재무제표(실적)에는 큰 부담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효과’가 발생했다. 성장 정체에 직면한 보험사들이 수익성이 높은 특정 상품에 몰려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 모두 수익성이 높은 질병·상해·간병보험(제3보험) 판매에만 집중하고 있다”며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설계사와 GA에 수수료를 뿌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수수료가 월 보험료의 30배를 넘는 사례도 등장했다. 작년 하반기 A 생보사는 제3보험을 판매한 GA에 월 보험료의 3400% 수준 수수료를 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2~3년 전만 해도 월 보험료의 1500~2000% 수수료를 지급하는 게 업계 관행이었지만 최근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수료가 급증했다.
새 회계기준 도입후 '착시' 현상
만기 수십년 달하는 초장기 상품, 회계상 비용 잘게 '쪼개기' 반영
만기 수십년 달하는 초장기 상품, 회계상 비용 잘게 '쪼개기' 반영

최근의 보험업계 수수료 급증은 ‘푸시 영업’에만 의존하는 국내 보험업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동차보험, 실손의료보험 등 일부 상품을 제외하면 고객이 먼저 보험상품에 가입하려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험설계사가 고객을 만나 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푸시 영업이 일반적이다. 이런 환경에서 보험사가 매출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설계사에게 더 많은 수수료를 지급하는 것이다. 보험업계 전반에 걸쳐 ‘수수료 출혈경쟁’이 벌어지며 비용만 급증하고 일반 고객에게 외면받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회계 착시’가 만든 수수료 경쟁
2일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41개 보험사의 총원수보험료에서 실제사업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18.4%에서 지난해 6월 말 21.4%로 상승했다. 원수보험료는 보험사가 계약자에게서 받은 보험료를 의미한다. 실제사업비는 수수료 등 사업을 운영하는 데 투입한 비용을 뜻한다. 원수보험료 내 실제사업비 비중이 올라갔다는 건 ‘같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더 많은 수수료를 지출했다’는 의미다.회사별 현황을 봐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기간 하나생명(12.2%포인트), 신한라이프(9.8%포인트), 롯데손해보험(9.4%포인트), 동양생명(8.6%포인트) 등의 사업비 비중이 크게 상승했다. 생명보험업계 1위인 삼성생명의 사업비 비중은 같은 기간 16.1%에서 20.0%로 올랐고, 손해보험업계 1위인 삼성화재도 19.5%에서 22.7%로 상승했다.
보험사가 설계사, 법인보험대리점(GA)에 지급하는 수수료를 늘리면 당장 순이익이 줄어들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는 2023년 보험업권에 도입된 새 회계기준(IFRS17)과 연관이 깊다. 과거에는 사업비 상각 기간(수수료 등을 비용으로 인식하는 기간)이 ‘7년’이었는데, IFRS17 도입 후에는 ‘전체 보험 기간’으로 바뀌었다. 국내 보험사가 판매하는 상품은 만기가 수십 년에 달하는 초장기 상품인데, 회계상 사업비를 잘게 쪼개 반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적에 대한 부담이 적다 보니 보험사는 너도나도 수수료를 높이기 시작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보험업계 모집 수수료는 IFRS17 시행 전인 2020년 10조원에서 지난해 32조원 규모로 치솟은 것으로 파악된다.
과거 전속 설계사 중심으로 상품을 판매하던 것과 달리 GA 중심으로 판매 채널이 바뀌고 있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GA는 여러 보험사의 상품을 판매하는 회사다. 보험사마다 상품 차별성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GA는 수수료를 더 많이 주는 보험사 상품을 판매할 유인이 크다. 이 때문에 보험사가 GA에 지급하는 수수료를 대폭 늘리는 등 출혈 경쟁이 벌어졌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업계가 상품을 혁신하기보다는 손쉽게 매출을 늘리기 위해 수수료를 올리는 방안을 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소비자에게 중장기 부담 전가”
최근에는 수수료가 월 보험료의 30배를 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작년 하반기 A생보사는 제3 보험(질병·상해·건강보험)을 판매한 GA에 월 보험료의 3400%에 이르는 수수료를 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객이 월 10만원을 내는 암보험에 가입했다면 해당 상품을 판매한 GA에 340만원가량의 수수료를 지급한 것이다.현행 법규상 보험계약 첫해에 설계사·GA에 지급하는 수수료는 월 보험료의 12배 이내로 제한된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규제를 피하기 위해 계약 2년 차 때 거액의 수수료를 몰아주는 ‘꼼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설계사와 GA가 받는 수수료는 기본적으로 보험회사가 부담하는 비용이다. 보험사가 수수료를 늘려도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담이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박 의원은 “보험사가 지급하는 수수료가 늘어날수록 소비자에게 비용이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며 “보험사의 과도한 수수료 경쟁이 소비자 권익 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