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가 지정학적 위험과 반도체 수급 불안정을 이유로 미국 내 자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건설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나섰다. 현장에선 파운드리 진입 장벽이 워낙 높기 때문에 머스크 CEO의 구상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머스크 CEO가 그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사례가 많기 때문에 허황된 계획은 아니라는 반응도 적지 않다. 테라팹이 현실화될 경우 자동차·로봇·우주 발사체를 중심으로 공정·소재·패키징 라인이 재편되며 파운드리 생태계 전반과 소부장 업계에 미칠 파급력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도체는 테슬라의 생존이 걸린 문제"
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테슬라는 최근 2025년 4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을 열고 중장기 사업 및 투자 계획을 밝혔다. 컨콜에선 머스크 CEO가 핵심 성장동력으로 내세운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와 무인 자율주행 '로보택시' 관련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테슬라의 반도체 공급망 확보 계획을 설명하는데 더 오랜 시간을 들이면서 머스크 CEO가 반도체 수급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 다시 부각됐다. 최근 반도체 품귀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자동차 생산 차질 가능성을 높아진 데다 원가 상승에 따른 부담도 커지고 있다.머스크 CEO는 "삼성전자와 TSMC, 마이크론 같은 파트너를 포함해 주요 공급업체들의 생산량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가정하더라도 충분하지 않다"며 "3~4년 안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제약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테슬라는 '테라팹(TeraFab)'을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테라팹은 파운드리와 메모리반도체 양산, 첨단 반도체 패키징 설비가 모두 수직계열화된 형태로 갖춰진 종합 반도체 제조 설비를 의미한다. 전기차 배터리와 부품, 완성차 등을 모두 생산하는 테슬라 기가팩토리와 유사한 형태로 추정된다.
머스크 CEO는 인공지능(AI) 기술 경쟁력과 관련해서도 반도체 공급 리스크를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테슬라의 AI는 메모리 효율성 측면에서 매우 뛰어나지만 3년 뒤를 예상했을 때 칩이 제때 도착하지 않을 위험이 존재한다"면서 "AI 칩이 없으면 옵티머스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깡통 인간처럼 쓸모 없어지기 때문에 반도체는 테슬라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수많은 기업들이 지정학적 위험에 대해 방심하고 있다"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배터리와 로봇, AI 칩을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머스크 CEO가 자체 반도체 팹 확보 의지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과거에도 자율주행·로봇·데이터센터용 AI 칩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며 테라팹을 직접 짓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당시에도 기존 공급사만으로는 장기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내세웠고 인텔과의 협력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테슬라가 반도체를 설계하는 것과 직접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대만 방문 중 가진 인터뷰에서 "(테슬라의 자체 칩 생산은)극도로 어려울 것"이라고 테라팹 구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황 CEO는 파운드리 운영을 '예술'에 비유했다. 그는 "첨단 칩 제조 팹은 단순히 공장(plant)을 짓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TSMC가 현재 본업으로 수행하고 있는 작업을 해내기 위한 공학, 과학, 그리고 '예술의 경지(artistry)'에 이르는 역량은 정말로 달성하기 어렵다"고 재차 강조했다. 황 CEO 또 "칩 제조(fabrication)가 하룻밤 사이에 달성될 수 있는 전문 영역이 아니다"라며 "반도체를 오랫동안 영위해 온 인텔 위탁생산 사업부 같은 기업조차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TSMC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첨단 파운드리는 대규모 자본, 장기간의 구축 시간이 동시에 필요한 산업"이라며 "공정 운영에 대한 해박한 전문 인력들이 밤낮으로 매달려도 어려운 것이 파운드리"라고 말했다. IT매체 톰스하드웨어는 "사업의 엄청난 복잡성을 고려할 때 테라팹의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머스크의 발언을 보면 최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의 작동 방식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이해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2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공정부터 바로 뛰어든다는 머스크 CEO의 시나리오는 더 비현실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재 삼성전자와 TSMC, 인텔 정도만이 진입한 2나노는 미세공정 난도가 급격히 올라간 구간이다. 이에 따라 머스크 CEO의 이번 발언은 테슬라의 '자체 팹' 선언이라기보다 2나노급 선단 공정 물량을 선점하려는 의지 표명에 가깝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경우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삼성전자 같은 외부 파운드리의 역할이 커진다.
IT매체 WCCF테크는 "테슬라가 반도체 제조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머스크 CEO가 실제로 2나노 칩 생산을 목표로 할 경우 현재의 파운드리 파트너들과 협력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테슬라는 그동안 AI 칩을 자체 설계해 왔지만 생산은 삼성전자·TSMC 등 파운드리에 맡겨왔다. 최근에는 AI5·AI6 칩을 삼성전자와 TSMC에서 병행 생산하는 전략을 확인한 바 있다. 때문에 테슬라가 선단 공정 확보를 전면에 내세울수록 삼성 파운드리의 협상 테이블도 다시 주목받을 수 있다.
소부장 업계에는 어떤 영향?
아직 먼 얘기지만 장기적으로 테라팹이 현실화할 경우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계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테슬라가 미국에 거대 공장을 지을 때 기술력이 검증된 한국산 장비와 소재를 대거 채택할 가능성이 커서다. 삼성전자 테일러 팹과 테슬라의 협업 관계를 고려할 때 국내 기업들의 북미 시장 진출 통로가 더 넓어질 것으로 시장에서는 보고 있다.파운드리 1개 라인을 새로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장비·소재 투자는 수십조원 규모다. 테라팹이 2나노급 이하 첨단 공정을 지향한다면 필요한 장비는 삼성전자·TSMC와 동일한 초정밀 라인업으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식각·증착·세정·열처리·측정, 그리고 고순도 가스·포토레지스트 등 소부장 업계에 '제3의 초대형 고객'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테슬라는 자동차·로봇·위성·AI 가속기까지 수요가 내부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직계열 기업인 만큼 테라팹이 가동되면 내재 수요만으로도 장기·대량 발주가 가능해진다.
소부장 측면에서 '테라팹'이 단순한 공급망 안정화 수단을 넘어 반도체 제조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테슬라가 필요로 하는 반도체는 스마트폰이나 서버용 고성능 칩과 물리적 요구 조건이 전혀 달라서다. 자동차·로봇·우주 시스템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고온·고전압·진동·방사선 환경에서 10년 이상 무중단으로 작동해야 하는 산업 인프라용 칩에 가깝다. 이 특성은 공정·소재·패키징 전반을 새로 설계하게 만든다.
기존 2나노 경쟁이 '더 작고, 더 빠른 트랜지스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테슬라가 요구하는 2나노는 '더 견고하고, 더 오래 가는 트랜지스터'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서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FET) 구조에서도 채널 두께와 절연막, 금속 배선 간격을 다르게 설계해야 한다. 고집적·저전력 중심의 모바일·PC·데이터센터용용 공정과 달리 테슬라용 반도체는 전력 스트레스와 열, 장기 신뢰성을 견디는 방향으로 공정 스택이 재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일한 2나노라 해도 EUV 마스크, 증착·식각 레시피, 금속·절연막 소재가 모두 달라진다는 뜻이다.
업계 관계자는 "테슬라의 자체 파운드리 구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머스크 CEO가 과거에도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성공시킨 전례가 많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미래를 내다보고 '머스크 파운드리'를 대비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