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햇살은 참 눈이 부셨다. 딱 20년 전 2006년의 봄날, 도쿄 힐튼호텔에서 강의를 했다. 대상은 한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출신 유학생 100여 명. 국적이 제각각인 그들의 공통점은 일본에서 힘겨운 유학 생활을 하며 일본롯데의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 하나. 처음에는 한국인만 대상이었는데 조국이 살만해지면서 개발도상국인 동남아 국가로 수혜 폭을 넓힌 것이다. 햇살 좋던 그 봄날, 고생하는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려 부르는 김에 신격호의 청년 시절을 잘 아는 사람을 데려와 강의도 듣자는 취지로 일본까지 불려가 좋은 추억 하나를 남겼다.태어나 보니 식민지였고 2등 국민이었다. 한 번 주어진 삶을 대충 수습하며 견디는 게 지겨워지던 19세에 갈 수 있는 가장 큰 도시, 도쿄로 탈출했다. 우유와 신문 배달, 공사장 인부를 전전하며 야간학교를 마쳤다. 긴 세월이 흐른 뒤 ‘그 눈물겹던 시절, 누군가의 도움이 그렇게 목말랐다’며 아주 이른 시기에 한·일 양국에 장학재단을 세워 고학생들을 지원했다.
우리 경제가 좋아져 3D업종에 일하려는 사람이 부족해지던 1993년, 그 빈 자리를 채우려고 외국인 산업연수생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문화적 준비가 미처 덜 된 상황, 여기저기서 어이없는 일들이 터졌다. 1년여를 지켜보던 그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서러움을 안고 돌아가게 놔두면 안 된다. 그들을 위해서 뭔가는 해야 되겠다’며 다시 사재를 털어 ‘롯데복지재단’을 설립했다. 남의 나라에서 고학하며 겪은 서러움이 일흔이 훌쩍 넘은 그 나이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담당 공무원들은 국내에 결식노인, 결손아동들이 여전히 있는데 외국인노동자를 지원하는 재단? 고개를 외로 꼬았다. 결국 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외국인노동자에게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재단이 출범했다.
1988년 포브스는 그 고학생을 세계 4위 부자로 발표했다. 한국 국적으로는 단군 이래, 그리고 지금까지 최고 기록이다. 그는 청장년기를 일본에서 보냈지만 자신이 묻힐 장소는 일찌감치 정해뒀다. ‘피라미드를 보고 나니까 저런 건 망자가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해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 땅의 안온한 품에 안기면 그만이니 비석이나 봉분을 크게 세울 생각은 하지 마라’고 엄명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남긴 그는 고향 산기슭에 주인이 누구인지 몇 글자 새긴, 가공도 안 된 와석(臥石) 옆 낮은 무덤에 누웠다. 6년 전 추웠던 1월, 99년의 세월 동안 온갖 유혹에도 조국의 국적만은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런 선배들 덕에 나라가 좋아지니 좋은 부모 만나 소년의 나이에 미국 이민을 가고, 부모 돈으로 명문 기숙학교와 최고 명문대를 나와 미국 국적을 취득할 수도 있다. 후손들이 그 정도는 너끈히 할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선배들이 그 고생을 한 거니까. 배타적인 미국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IT 친화적’인 조국의 인프라를 활용해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우리가 남은 아니니까.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조국에 빚지지 않고 성공한 손정의라면 몰라도 조국의 고객, 노동자들의 성원과 희생을 기반으로 성공했다? 그러면 최소한의 ‘고마움과 미안함’은 있어야 한다.
750만 명이나 해외에 거주하면 영락없는 디아스포라 민족인데 ‘돌아와 성공’한 자에 대한 질시는 여전하다. 전쟁과 가난, 독재, 외환위기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함께 견뎌내지 않았다는 불편함이 원인이겠지. 그런 걸 ‘사회적 부채’라고 하던가. 그런 시선을 평생 안고 살았던 신격호는 낮추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롯데타워가 ‘가난한 흙수저로 태어나도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횃불이라면 그의 낮은 무덤은 ‘아무리 부자라도 결국은 한 평만 주어진다’는, 그대들의 하버드 MBA에서 배울 수 없는 지혜의 상징이다. 하필 롯데타워 맞은편의 쿠팡 본사 그곳에서 높은 롯데타워만 쳐다보지 말고 고향의 낮은 무덤을 선택한 그의 고뇌도 한 번 돌아보시라.
20년 전 그 강의, ‘인간은 같은 세대 간의 협력과 다른 세대 간의 이어달리기로 여기까지 왔으니 장학금은 성공한 뒤에 가난한 후배들에게 갚으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