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라면 먹을래요?”
“(상우)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지금처럼 추운 겨울,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봄날이 지나 새로운 봄이 오는 시점에 끝난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장면이 인물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시점에 머문 채, 그 장면 안으로 인물이 들어오게 만든다. 인물들은 대사도 많지 않다. 공간이 말을 대신해 인물의 관계를 조용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설명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멀어진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공간에 대한 깊은 묘사보다는 그저 차분히 드러내려 한다.
재미있는 특징은 인물들이 좀처럼 움직이거나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자가 있으면 앉고, 없으면 바닥에라도 쪼그려 앉는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 분)와 라디오 PD 은수(이영애 분). 이제 두 사람이 놓인 공간과 그들의 앉은 자세를 따라가 보자.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 중 하나인 '소리여행 Ⅱ (산사에서)'
#1 버스터미널 대합실“(은수)근데 좀 늦으셨네요”
대합실 벤치에 앉아 상우를 기다리며 졸던 은수. 처음 만난 상우에게 거침없이 먼저 악수를 건넨다. 대합실은 버스나 사람을 기다리는 장소다.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은수. 하지만 상우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홱 하고 먼저 나가버린다. 관계에 능숙한 은수는 언제나 먼저 움직이는 쪽이다.

#2 대나무 숲
쏴아- 댓잎이 바스락거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대나무 이파리 소리를 녹음하는 상우. 은수는 조심히 그 옆에 가 쪼그려 앉는다. 댓잎 사이로 햇빛이 아른거린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들어주는 대나무 숲.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싼다.

#3 동네 할머니의 집
“(은수)내가 못 먹을 것 같아요?”
대나무 숲에서의 녹음을 마친 두 사람은 대나무 숲 옆에 사는 동네 할머니의 집에서 식사를 한다. 작고 소박한 방. 밥상에 마주 앉아 식구처럼 밥을 나누어 먹는 두 사람. 밥은 산처럼 가득이다. 은수는 기세 좋게 남김없이 다 먹어 치우겠노라 말한다. 그래 놓고선 밥 한 숟갈 크게 떠서 상우의 밥그릇에 마음을 얹는다.

#4 개울
개울이 졸졸 흐른다
물 흐르는 소리를 녹음하는 상우와 그 옆에서 보조하는 은수. 아무런 대사도 없이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만 가득.

#5 차
“(은수)어휴, 쪽팔려”
라디오를 달칵 켜는 은수. 시청자 사연을 읊는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헤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사랑??????.’ 무언가 들켰다는 듯 라디오를 꺼버리는 은수. 곧이어 다시 켜는 상우. ‘이 밤에 다시 전화 올 수 있습니다. 직접 걸면 또 어때요?’ 은수는 선글라스와 목도리에 자신을 숨긴다. 어두운 밤길에 차 내부만 따뜻한 불빛이다.

#6 녹음실
“(상우) 세 번째 소리가 더 좋아요”
대나무 숲에서 녹음해온 트랙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린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상우. 그러나 그 트랙이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말하긴 어렵다. 은수는 상우에게 지쳤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다. 은수는 상우가 선택한 트랙을 라디오에 흘려보낸다.

#7 녹음실 복도
“(은수)커피 마시면서 외웠어요, 지금”
녹음을 마친 후 복도에 나란히 앉은 둘. 상우는 소파 끝에 걸터앉았고, 은수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어 기댔다. 자신을 걱정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은수.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다 불쑥 소화기 사용법을 아느냐 묻는다. 안전핀을 뽑은 후, 노즐을 화원으로 향하고,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쥔다. 은수는 자신의 마음을 정했다. 지금.

#8-9 은수의 집 & 상우의 집
“(상우)아 거기 비 오는구나, 여기 비 안 와요”
은수의 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결심했다는 듯 상우에게 전화를 건다. 상우의 집은 은수의 집과 거리가 멀어 비가 닿지 않았다. 거센 빗소리가 상우의 잠을 깨운다. 상우의 방에만 희미한 불빛이 비친다.


#10 산사1
은수의 옅은 한숨
절에 먼저 도착해 기도하는 은수. 상우는 문밖에서 그 마음을 조심히 바라본다.

#11 산사2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밤. 모든 걸 씻어내듯 세차던 며칠 전의 비는, 조용한 눈이 되어 슬며시 쌓이고 있다. 잔잔한 풍경소리. 녹음하는 상우 옆에 가만히 가 앉는 은수.

#12 산사3
풍경이 딸랑거린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드는 툇마루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다. 상우는 기대어 졸고, 은수는 그런 상우를 바라본다. 버스터미널 대합실(#1)에서와는 달리 서로의 자리가 뒤바뀌었다. 이제 은수는 먼저 일어서지 않는다. 신발도 신지 않는다. 처마 밑, 두 사람에게 햇살이 가득 내린다.

#13 차
“(은수)라면 먹을래요?”
자신의 집 앞에서 내리는 은수. 되돌아가 달칵 차 문을 열고 불쑥 묻는다. 이번에도 역시나, 관계에 능숙한 은수가 언제나 먼저 움직인다.

#14 은수의 집
“(은수)자고 갈래요?”
막상 안으로 들이니 어색함이 감돈다. 소파에 쪼그려 앉아 자신을 반쯤 숨기고 머리칼을 연신 매만지는 은수. 은수는 주방으로 자리를 피해 물을 올린다. 갑자기 몸을 돌려 불쑥 묻고선 생라면을 부수어 입에 넣는다. 물은 아직 끓지도 않았는데.

#15-16 술집 앞의 상우 & 집 앞 도로의 은수
“(은수)술 마시니까 멋있다”
회식 자리를 빠져나온 상우는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 통화를 한다. 은수는 도로에까지 나와 상우와 같은 자세로, 아니 훨씬 더 작게 웅크려 앉아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 술기운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 상우.


#17 차
“(은수)좀 더 속력 좀 내 봐요”
운전석의 상우. 그 무릎 위에 은수.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함께 차를 내달린다.

#18 은수의 집
“(은수)오늘은 떡라면. 김치도 넣어”
은수는 아무 옷이나 입고 다리털을 정리하며 라면을 요청한다. 자신의 라디오를 들려주기도 부끄러웠던 은수(#5). 이제 그냥 라면은 끌리지 않는다.

#19 은수의 집
“(은수)나 김치 못 담가”
상우의 아버지가 담근 김치를 나누어 먹는다.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자는 상우. 가깝게 마주 앉은 것과는 달리 서로의 시선은 어긋난다. ‘내가 담가 줄게’ 상우는 고개를 푹 숙인다.

#20 바다
쏴아- 파도가 흩어진다
바닷가에서 상우는 소리를 녹음하다 은수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 마음을 드러내는 상우와 호응하지 않는 은수. 어느덧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있다.

#21 녹음실 복도
“(은수)소화기 사용법 알아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은수. 옆자리 남자에게 소화기 사용법을 아느냐 묻는다. 이내 후회하며 말을 거둔다. 그러나 몸을 기울이며 자신에게 호응하는 남자. 여전히 자판기 옆에는 소화기가 놓여 있다.

#22 차
“(은수)상우 씨, 이제 뭐 할 거야? 이 일도 끝나 가는데”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상우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은수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다. 따가운 여름 햇살이 차 안으로 스며든다.

#23-24 상우의 집 & 은수의 집
쏴아- 세찬 비가 내린다
처음 그때처럼 서로가 생각난다. 그러나 각자의 집, 각자의 공간이다.


#25 은수의 집 앞
“(상우)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별을 말하는 은수에게 묻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봄날은 지났다.

시간이 지나 다음 해가 되어 벚꽃이 흐드러지던 날, 은수는 상우를 찾아온다. 재회를 말하는 은수에게 상우는 이별을 말하고 뒤돌아선다. 은수는 상우를 뒤따라와 옷깃을 다듬어주며 처음 그날처럼 먼저 악수를 건넨다. 이번엔 상우가 멀어지는 은수에게 먼저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상우는 그제야 미뤄두었던 이별을 마무리 짓는다.
쏴아- 바람에 흩날리는 들풀 사이에 홀로 선 상우. 한때 은수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최영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