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넘게 투자와 금융업을 하면서, 내가 본 인도네시아를 표현하는 문장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2억8000만명의 인구, 전 세계 4위 시장. 가장 젊은 소비자층. 디지털 전환이 열어줄 폭발적 잠재력.”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도 우리는 이 문장을 들었고, 그때마다 자카르타행 항공편은 '다음 신흥시장'을 꿈꾸는 자들로 가득 찼다. 물론, 서사는 늘 옳았다. 틀린 숫자는 하나도 없다.
문제는, 숫자가 말하지 않은 나머지 90%를 아무도 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2021년 94억달러(약 13조원)에 달한 인도네시아 스타트업 투자금은 불과 3년 만에 4억4000만달러(약 6000억원)로 쪼그라들었다. 고점 대비 95%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경기순환이 아니라, 집단적 환상과 신뢰 붕괴의 청구서다.
자본시장 미성숙이라는 구조적 리스크-'갑자기 과식한 변비 환자'가 된 동남아
동남아 스타트업·프라이빗에쿼티(PE)/벤처캐피털(VC) 생태계를 설명할 때, 나는 자주 이런 비유를 쓴다. “갑자기 과식한 변비 환자.”
퇴로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은 자본시장에, 외부에서 VC 자금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먹은 것을 소화해 밑으로 배출할(IPO·M&A·세컨더리) 인프라는 미성숙한데, 이미 삼켜버린 돈을 다시 토해내자니 이해관계자 모두가 피를 본다. 그래서 시장은, 소화도 배출도 못 하는 채 시간만 보내는 ‘정체 상태’에 갇힌다.
자본시장은 본질적으로 신뢰 인프라 위에서만 작동한다. 공시, 규제, 사법 집행, 회계·감사, 금융감독의 일관성이 최소한의 베이스라인을 깔아줘야 한다. 이 인프라를 갖추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과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비용이 필요하다. 싱가포르를 제외한 동남아 다수 국가에서, 우리는 이 '신뢰 인프라'가 아직 절반도 완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숫자가 말해주는 ‘빙하기’의 실체-유동성이 사라지자 서사가 먼저 무너졌다
2021년 인도네시아 테크 장면은 말 그대로 축제였다. 모두가 “자카르타를 디지털 수도(Digital Capital of Asia)로”를 외치며 유니콘 리스트를 업데이트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2024년 4분기, 인도네시아 스타트업 딜 수는 단 13건. 6년 만의 최저치다. 초기 단계(시드~시리즈 A)만 겨우 숨을 쉬고 있을 뿐, 후기(레이트) 스테이지는 사실상 멸종 구간에 들어갔다.
유명 유니콘들의 추락은 더 상징적이다. 국민 플랫폼으로 불리며 상장 당시 기대를 모았던 부칼라팍(Bukalapak)과 고투(GoTo)의 주가는 공모가 대비 80% 이상 빠졌다. 부칼라팍은 결국 15년 만에 핵심이던 이커머스 사업을 접었고, 고투 그룹의 심장이라고 불리던 토코페디아(Tokopedia)를 경쟁사인 틱톡에 넘겼다.
워런 버핏의 말처럼, '물이 빠지자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리고 그 발가벗은 몸이 드러난 곳은, 늘 그렇듯 '이야기(story)'가 지나치게 앞서 나갔던 시장이다.
선한 ‘스토리’ 뒤에 숨은 구조적 사기-이피셔리·인베스트리·타니펀드가 남긴 것
이번 사이클이 유난히 뼈아픈 이유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선한 스토리로 포장된 도덕적 해이”가 집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우선 양식업 유니콘 이피셔리(eFishery)가 있다. 10년 전, 자카르타 출장 중 세나얀의 한 호텔 로비.
한 젊은 창업자가 나를 찾아왔다. 이피셔리의 최고경영자(CEO) 지브란 후자이파였다. 목적은 명확했다. 자금 조달을 논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투자자로서의 ‘직감’으로 즉시 호기심을 잃었다. 비즈니스 모델은 인상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창업자의 눈에서 신념(conviction)과 경험을 읽을 수 없었다. '본인이 만든 게임'을 설명하는 창업자가 아니라, '어디선가 가져온 슬라이드'를 외우는 순진한 젊은 세일즈맨에 가까웠다. 그래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네덜란드의 글로벌 1위 해양 양식업 투자펀드 아쿠아스파크(Aqua-Spark)가 이 회사에 투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피셔리는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반열에 올라섰다. 그때 나도 잠시 흔들렸다. “30년 금융과 투자를 했다는 자만이었나, 내가 뭔가를 결정적으로 놓친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이랬다. 이피셔리는 2018년부터 6년간 이중장부를 운영했고, 매출을 실제의 5배 수준으로 부풀렸다. 그 규모만 6억달러(약 8000억원)에 이른다. 어촌 소득을 늘려준다며 칭송받던 기업이었고, 소프트뱅크·테마섹, 그리고 세계 4대 회계법인까지 6년 동안 속아 넘어갔다.
10년 전 호텔 로비에서 느꼈던 불편함은 틀리지 않았다. 틀린 것은, 직감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글로벌 네임 밸류에 스스로를 검열한 나의 태도였다. 실사는 있었지만, 진짜 실사는 없었다.
핀테크 유니콘 인베스트리(Investree)도 있다. 인베스트리의 CEO는 회사 자금을 개인 계좌로 빼돌리다 적발됐다. 해임 후 카타르로 도피했지만 인터폴 적색 수배를 받고 결국 송환·구속됐다. '테크 기반 금융 혁신'이라는 말 뒤에 가려져 있던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 자금 관리와 내부 통제의 부재였다.
농민을 울린 타니펀드(TaniFund)도 있다. 농촌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P2P) 대출을 표방한 타니펀드의 부실률은 64%에 달했다. 결과적으로 투자자 자금 약 140억원이 증발했고, 경영진은 구속됐다. 여기에 더해, 인도네시아 테크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불리던 고젝(Gojek) 창업자, 전 교육부 장관 나디엠 마카림마저 부패 혐의로 체포됐다. 국가의 성장 서사와 테크 영웅 신화가 동시에 균열을 보인 사건이다.
“성장 스토리 세일즈”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실제냐’를 묻는다. 2021년 투자 광풍 시기, 우리는 무엇을 했나. 많은 VC와 투자자들이 딜을 놓칠까 봐 실사를 서둘러 생략하거나, 형식적으로만 수행했다. 비상장 기업에는 공시 의무가 없고, 로컬 규제는 여전히 느슨했다. 내부에서 썩어들어 가는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했다.지금, 그 비용을 시장 전체가 치르고 있다.
이제 질문은 바뀌었다. ‘매출이 얼마나 성장하느냐?’가 아니라, ‘그 매출이 진짜냐?’로. ‘얼마나 많은 임팩트를 약속하느냐?’가 아니라, ‘그 임팩트를 측정·검증할 수 있느냐?’로. 동남아 VC들은 뒤늦게서야 거버넌스 강화, 내부 통제, 리스크 관리 체계를 정비하는 이른바 ‘매튜레이션 맵(Maturation Map)’을 도입하고 있다.
시중에는 여전히 막대한 드라이파우더(투자자의 화력) 가 남아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맡길 상대를 찾지 못해서 투입을 멈춘 상태다.
30년간 반복된 내러티브를 넘어서-'젊은 인구, 거대한 시장'이라는 주문에서 깨어날 때
30년 동안 우리는 같은 슬라이드를 보았다. 2억8000만명의 인구, 세계 4위 시장, 젊은 소비자, 디지털 전환, 폭발적 성장 잠재력. 표현만 조금 추가되고, 바뀌었을 뿐, 내러티브의 구조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문제는 인도네시아 하나가 아니다. 이 패턴은 형태만 바뀌어 베트남, 필리핀, 인도, 다음 신흥시장, 그다음 프런티어 마켓으로 계속 복제된다.
이제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인구가 많다'는 게 왜 곧 기회인가? '젊은 소비자층'이 있다는 것이 왜 자동으로 성장률을 보증하는가? '디지털 전환의 잠재력'은 누가, 어떤 데이터와 인센티브 구조를 가지고 검증했는가? 그 서사는 누구에게 유리한 이야기인가? 국가 경제가 8% 성장하는 게 내가 하는 중소기업 사업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덩치만 키운 가짜 유니콘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분명 새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막연한 스토리 세일즈'를 세울 것인지, 아니면 기본기가 단단한 기업과 투자자들이 새로운 표준을 만들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선택의 문제다.
한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던지는 질문
이 글은 인도네시아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베트남에 진출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오히려,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쓰는 내부 메모에 가깝다. 해외 진출과 투자를 고민하는 한국의 기업과 기관투자가들에게, 몇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성장 지표, 진짜인가. 고객 수, 거래액(GMV), 다운로드, 활성 이용자. 이 모든 숫자 뒤에, 실제 현금 흐름과 검증 가능한 데이터가 있는가.
실사했다면, 누구의 머리와 눈으로 했는가. 로컬 리스크를 스스로 분석했는가, 아니면 '빅4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안도감에 책임을 외주화했는가. '2억8000만명 인구의 시장'이라는 PPT 한 장에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설득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신뢰 없는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투자가 아니다. 도박이다. 내공 없이 규모만 확대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착시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자살 행위다.
이제 우리는, 미디어와 소셜미디어에서 반복 재생되는 '성장 스토리 세일즈' 대신 적어도 100배는 더 깊이 파고드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숫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의 구조와 이해관계를, 내러티브가 아니라 로컬 제도·사법·거버넌스의 실제 작동 방식을,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입증된 실행력과 리스크 관리 역량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의 해외 진출·투자 전략은 여전히 30년 된 내러티브가 기대고 있는가. 아니면 현지의 현실과 리스크를 몸으로 받아들일 준비까지 끝난 상태인가.
한국 기업과 자본이 다음 10년의 동남아에서 또 한 번 '스토리의 소비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는 설계자가 될 것인지는 지금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데이비드 김 테크 저널리스트·Asia Value Creation Awards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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