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를 지낸 7선의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별세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민주평통의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22일 베트남 호찌민에 방문했다. 출장 중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긴급 귀국절차를 밟았지만, 베트남 공항 도착 후 호흡 곤란으로 호치민 탐안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스탠트 시술 등 현지 의료진이 치료를 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25일(현지시간) 오후 2시 48분 별세했다.
민주평통은 현재 유가족이 관계기관과 함께 국내 운구 및 장례 절차를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1952년 충남 청양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유년 시절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 용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한 뒤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1세대 운동권 출신인 고인은 유신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해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서울 신림동에서 사회과학서점 '광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36세로 13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다. 이후 불출마한 2008년 18대 총선을 제외하면 지역구 후보로만 7번 출마해 모두 당선돼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고인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1998년 2월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장관 시절 고교 평준화를 실시하고 학력고사를 폐지하는 대신 수능시험 제도를 도입하는 등 교육개혁에 나섰다. 당시 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이해찬 세대'로 불리기도 했다.
고인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에 발탁됐다. 노 대통령이 고인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책임 총리', '실세 총리' 등으로 불렸다. 총리 시절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를 설계를 주도했다.
2016년 20대 총선 때 컷오프(공천 탈락)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고인은 "저는 부당한 것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의에 타협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러한 잘못된 결정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대선 기획을 담당해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고인은 민주당 대표를 맡아 2020년 4·15 총선 때는 민주당의 180석 압승을 이끌었다. 이후 같은 해 8월 당 대표직을 내려놨다. 2024년엔 이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 시절 총선을 앞두고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아 다시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고인을 "국회의원과 주요 공직을 두루 거친 정치계 원로"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오랜 세월 통일문제에 전념하고 활동해온 인사로서 원숙한 자문을 통해 대통령의 대북·통일 정책을 뒷받침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그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했다.
여야 정치인들은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NS에 "평생 민주화와 민주정부를 위해 헌신하신 총리님, 훌훌 털고 편안히 영면하십시요"라며 "감사했고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 부의장님이 운명하셨다"며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셨다. 감사했고 존경한다"고 적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7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역임하시며 오랜 세월 대한민국 정치 현장에서 소임을 다하셨다"고 밝혔다.
진영기 한경닷컴 기자 young71@hankyung.com